가장 아름다운 바다는, 아직 아무도 건넌 적이 없다
가장 아름다운 아이는 아직 자라지 않았다
가장 아름다운 날들을, 우리는 아직 본 적이 없다
가장 아름다운, 당신에게 하고 싶은 말들을,
나는 아직 입에 담지 못했다
_ 나즘 히크메트, <타란타 바부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_ 오카 마리, ⟪가자란 무엇인가⟫, 두번째테제 2024, (김상운 옮김) 12쪽에서 재인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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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5일은 우리에게는 '스승의 날'입니다. (찾아뵙지 못하지만, 그래서 부끄럽습니다만, 스승님들께는 늘 감사한 마음입니다.) 그리고 팔레스타인인들에게 5월 15일은 아랍어로 '재앙'을 뜻하는 '나크바' 추모의 날(Nakba Day)이기도 합니다. 올해로 78주기를 맞는 이 날은 시온주의자들의 침략으로 75만명 이상의 팔레스타인인들이 터전을 잃고 강제추방된 사건을 기억하는 날이고, 그해(1948년) 시작된 팔레스타인 지역의 집단학살은 오늘도 진행중입니다. 팔레스타인 지역과 전세계 팔레스타인인들의 디아스포라 공동체들, 팔레스타인 연대 등을 중심으로 진행되던 나크바의 날, 서울에서도 토요일 2시 동십자각에서 특별집회가 열린다고 해요. 올해 처음 서울 나크바의 날 행사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스라엘과 미국이 일으킨 전쟁의 와중이라, 전보다 더 주목을 받는 집회가 되고 있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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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사회의 행보와 달리, 모처럼 이스라엘에 대해 공감되는 언급을 했던 대통령이지만 지난 달 외교부는 평화활동가 해초의 여권효력정지 처분을 내렸습니다. '자국민의 안전과 보호'라는 명목으로요. 그 며칠 뒤에 대통령은 또 학교현장학습에 대해 '안전과 보호'는 '구더기 무서워 장 못담그는' 것이라며, 학생들의 기회를 빼앗지말라고도 했지요. 공권력이 말하는 '안전과 보호'에도 일관성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좀 답답한 마음입니다. 이런 분위기이다보니 어떤 댓글에서는 해초 활동가를 두고, 이스라엘 감옥에 강제구금된 것을 구해놨더니 철없이 또 가자지구로 향하더라며 비난하고 있었어요. (해초의 활동을 응원하신다면: 여권효력복구를 촉구하는 서명페이지)
뉴스를 보고 듣고 읽으면 그저 우울할 뿐이기에 뉴스를 그만보고 싶다는 분들도 꽤 계셨지만, 가정의 달이기도 한 이 5월에는 뒤늦긴 했지만 망국과 관동대지진을 목도한 조선청년들의 손에서 탄생한 5월 5일 어린이날을 기리며, 또 이란 미나브초등학교에서 포화에 희생된 어린이들을 기리며, 그리고 아직 입에 담지 못한 그 '아름다운 말들'을 입밖으로 내어놓는 날을 기대하며 '나크바의 날' 소식을 전해봤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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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또문소식은 아래 순서로 쓰여졌습니다.
- 또문개더링 (6월 04일) : 담소재 방문의 날
- 또문독서회 (4-6월)
- 지금 여기에 : 지승경, "No War. 전쟁반대. 출구는 있다."
조한혜정, 박완서 아카이브 조성기념전 방문기록
- 함께 나눠요 : 두애린, "담장을 넘지 못한 말들에 귀 기울이며"
이헌미, "당신을 이해하기 위하여: 이라영의 《쇳돌》" 김주희, "날계란과 케첩으로 쓴 항의, 헌법을 다시 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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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소재에서 만나요날씨를 이유로 무기한 미뤄졌었던 담소재에서의 신년회 기억하시지요? 더 더워지기 전에 만나야 한다는 의견들이 있어 6월 4일로 정하게 되었어요. 오전 11시부터 오후 03시까지 샌드위치 담소모임을 가지려고 해요. 물론 아름다운 풍광과 함께 하는 산보도 함께 해야지요.선거 다음 날이고, 해남의 고정희시인 주간인 때예요. 나누게 될 이야기가 너무너무 많을 것 같지만, 호주머니 한 쪽에 고정희 시인의 시도 한 편씩 가져와주세요. 오랜만에 뵙겠습니다.참가신청하기: https://forms.gle/XvApKrdrbmxL9LJD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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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문화 소모임, 또문독서회는 진행중 (회원모집은 언제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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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4쪽이나 되는 책 ⟪남성 판타지⟫는 독서는 아직 진행중이에요. 6월 1일이 마지막이지만 그 날이 되어야 다음 책 선정이 이루어질 것 같습니다. 최근 SNS를 달군 수많은 소식 중에는 전쟁소식에 더하여, 뱅크시의 깃발 든, 깃발로 눈이 가려진, 정장의 남자 동상 소식을 전하는 세계언론의 보도들이 이어졌습니다. 정말 ⟪남성 판타지⟫의 표지에 사용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그런 동상이었어요. 시민사회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200억원이 넘는 예산을 사용하면서 강행된 광화문 '감사의 정원'도 같은 맥락의 조형물이겠고요. MTV를 기억하는 X세대들의 극찬을 받는 뮤직비디오 Storm까지, 분명 1464쪽으로도 부족한 이 ⟪남성 판타지⟫의 세계를 살아내는 우리를 응원하면서 이번 독서는 종반부를 향하고 있습니다. 응원합니다, 여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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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에
- 오픈카톡방에서 반가운 첫 인사를 나눠주셨던 지승경 님께서 노킹즈 시위에 참여하면서 느꼈던 염려와 성찰을 전해주셨어요.
- 지난 달 번개모임으로 방문했던 박완서아카이브. 제안을 주셨던 조한혜정 동인께서 언제나 감탄했던 메모광다운, 그러면서 좋은 제안이 담긴 방문기록을 보내오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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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 War. 전쟁반대. 출구는 있다.
지승경(또문친구, 노트르담대학교 박사후 연구원)
지난 2월 28일 미국과 이스라엘이 인공지능을 이용하여 “표적 설정 오류”로 인해 이란 남부 호르모즈간주 미나브 여자 초등학교를 폭격한 날 이후, 나는 SNS와 뉴스를 끊었다. 학기는 계속되고 있었고, 수업은 매주 돌아오며 할 일들은 쌓여 있었다. 주차장 차 안에서 한참을 울고 나서는 또 닥친 일들을 해 나가야 했다. 내가 뉴스를 보든 안보든 학살은 계속되고 있고 지금도 그렇다. 하루는 집 근처 공원에 나갔는데 다양한 인종의 아이들이 해맑게 뛰어놀고 있었다. 푸른 하늘, 진녹색의 잔디밭, 흘러가는 강물, 강물 위에 거위들. 봄날의 ‘일상’이 여기에 펼쳐져 있는 것이 기이했다. 저기에는 관들이 쌓이고 있는데. 아, 그렇지, 한국전쟁 때도, 베트남전쟁 때에도, 이라크전쟁, 아프가니스탄 전쟁 때에도 저 바다 건너 수백만명이 죽어 갈 때, 미국 본토는 일상이었다. 전쟁 특수로 경제는 더 성장했다. 섬뜩한 일상이며 잔혹한 평화다. 역사학자 Ajay Skaria가 Gaza and the Unsettling Equality of Academic Freedom(가자와 학문적 자유의 불안한 평등성) (원문보기: Critical Times 2025, Zoom토크 유튜브링크)에서 미국과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에 대한 폭력에 관해 한나 아렌트의 사유를 빌어 주장한 대로, 미국 트럼프 공화당은 악마적이고 의도적이고 잔혹한 급진적 악(Radical Evil)을 펼치고 있다면, 미국의 민주당은 지극히 평범하고 주어진 업무를 수행할 뿐이며, 이 행동의 결과들을 생각하지 않는 무사유의 평범한 악 (Banality of evil)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 이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이다. 유가 폭등, 주식 시장의 요동, 미나브 초등학교 폭격 미사일이 Made in USA인지에 대한 논쟁 모두 급진적 악과 평범한 악 사이를 요동할 뿐이다.
이란에 대한 전쟁이 계속되는 가운데, 3월 28일, 미국 전역에서 트럼프 대통령 반대시위인 세 번째 No Kings시위가 있었다. 2025년 10월의 두번째 No Kings시위는 뉴욕 경찰청 추산 100,000 명이 미국 전역에서 시위에 참여하였고, 3월 28일 시위는 두 번째 시위보다 참가인원이 많았다고 한다. 이란에 대한 전쟁 이후로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반대와 비판의 목소리가 커지는 가운데, 시위에서는 “No Kings”, “No War”가 중심구호가 되었다. 내가 현재 거주하고 있는 인디아나 주는 2012년 대선부터 계속해서 공화당 후보를 지지해온 레드 스테이트이다. 2024년 대선에서 인디아나의 39.52%의 유권자가 민주당을 지지한 만큼, 민주당 지지자들도 상당수 거주하고 있고, 민주당 세력을 확대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노트르담 대학교가 있는 작은 도시 South Bend의 도심 중앙에서도 시위가 열렸고, 수 천명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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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3월 28일 South Bend에서. 사진: 지승경)
미국 시위의 특징이 있다면, 개인들이 다양한 창의력을 발휘해서 피켓, 의상, 소품 등을 만들고 시위에 참여한다는 점이다. 할로윈 때나 볼 수 있는 동물 모양 탈, 큰 공룡 인형을 쓰고 나오는 등, 몇 일동안 직접 만든 시위 복장을 입고 나오거나, 직접 만든 피켓을 들고 나온다. 도로를 사용하지 않는 경우는 도로 옆 인도를 따라 행진을 하고, 이때 지나가는 차들이 지지의 경적을 울리며 서로 환호 한다. 차를 시위 구호로 장식하여 연대를 표하기도 한다. 또한 트럼프 지지자들이 성조기와 트럼프 깃발을 흔들며 지나가기도 했다. 3월 28일 No Kings 시위에서도 가지각색의 피켓과 의상들이 등장했다. 엡스타인 파일의 뉴스와 논쟁을 반영해서 트럼프 대통령을 변태적인 존재로 드러내는 그림들이 많았다. 벌거벗은 트럼프가 끈에 묶여서 특정 성적 행동을 하는 그림도 있었고, 트럼프 대통령의 얼굴과 몸은 정치적 풍자의 대상으로 과장되고 희화화해서 재현되었다. 아동 성애자로 트럼프를 비난하는 문구들도 많았다. 이러한 풍자들과 ‘웃긴’ 그림들은 나에게는 하나도 웃기지 않았다. 이러한 재현들은 현재 미국의 수 많은 문제들과 이란과 팔레스타인에서 일어나고 있는 학살과 죽음, 비참한 상황들이 마치 한 개인 정치인의 “변태”적인 성적취향과 제왕적 정치행태 때문에 일어나는 것으로 수렴하기 때문이다. 이는 명백한 성폭력 구조와 가해를 드러내는 것을 방해한다. 또한 미국 사회 전체가 전쟁 기계가 되어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지 않는다.
2026년 2월 부키 출판사에서 나온 < 미국은 왜 전쟁을 멈추지 못하는가> (윌리엄 D. 하텅 , 벤 프리먼 저자(글) · 백우진 번역) 에서 드러나듯이 연간 2조 달러 (한화로 약 2,370조 원) 규모인 미국 군산복합체는 행정부, 정당정치, 군부, 언론, 각종 연구소들, 대학, 문화산업, 게임산업에 이르기까지 미국 사회 전체를 장악하는 한 구조이며, 이러한 사회적 기구들은 전쟁 준비, 전쟁 수행, 전쟁 정당화, 전쟁에 대한 문화적 재현, 전쟁에 대한 반대여론 통제까지 미국이라는 전쟁 기계를 작동시키는 데에 제 몫을 담당하고 있다. 즉 전쟁을 멈추지 못하는 전쟁기계 미국을 만들어 온 것은 트럼프 라는 제왕적 대통령의 출현보다 훨씬 더 오래 전부터 구조화 되어 왔고, 그리고 더 확장된 정치-경제-문화-교육의 사회 구조 속에서 만들어져 왔다. 한국에서 윤석열 대통령 탄핵 요구와 함께, 한국의 시민사회는 체제전환운동을 조직하고 추진하고 있다. 미국사회 역시 전쟁 기계의 해체와 그 방법, 즉 군산복합체에 쏟아온 막대한 자원을 다른 무엇을 위해 지원하고 투자 할 것인지에 대한 체제의 전환이 논의되어야 한다. Divestment, 즉 투자철회 요구는 이러한 체제 전환의 요구 중 하나이다.
2024년 미국 45개주 대학 캠퍼스에서 팔레스타인 지지 시위가 있었고, 60개가 넘는 대학에서 학생들과 교수 등 총 3,100명이 체포되었다. 팔레스타인 연대는 보이콧, 투자철회 및 제재(Boycott, Divestment and Sanctions, BDS Movement )를 요구하고 있으며, 학생들과 교수들은 각 대학들이 팔레스타인 공격과 점령, 감시에 쓰이는 무기와 기술 체계를 제공하는 보잉, 록히드 마틴, 캐터필러, 아마존, 구글 (Boeing, Lockheed Martin, Caterpillar, Amazon, and Google) 등의 기업에 투자되는 대학의 모든 자금을 중지할 것을 요구하고있다. 최근 샌프란시스코 주립대학은 학생들의 요구를 수용하며 투자철회를 결정하였으며, 다른 대학들에서도 학생들의 투자 철회 요구가 계속되고 있다. 학생들은 또한 저런 대기업에 취업해야 하는지를 논쟁하며 실존적인 고민을 하고 있었다.이렇게 미국에서의 잔혹한 일상 속에서 하루에도 몇 번씩, 나는 누구 여긴 어디를 묻곤 하던 중에, 또문 소식지를 통해 장혜영 전 의원이 내건 전쟁 반대 현수막을 보았다. 급진적 악과 평범한 악 사이의 미로에 갇혀 있다가, 분명한 출구를 본 것이다. No War. 전쟁반대. 출구는 있다. (2026. 05, 또문브런치에서 읽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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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서 아카이브 조성 기념전 (2026. 2. 09~6. 30) <참으로 놀랍고 아름다운 일> 방문기록
조한혜정(또 하나의 문화 동인)
4월 17일 금요일에 다녀옴.
조한과 김은실, 히옥스, 풍뎅이, 그리고 인턴 온 친구 메이시.
500년을 산 사람, 전쟁- 벌레처럼 살기, 대중- 반자본주의 속물성, 여성- 서 있는 여자, 페미니즘.
아기보고 집안일 하면서 엎드려서 글 쓰다가 등단 15년 후에야 <자기만의 책상>을 갖게 된 작가.
1931 출생, 1970년에 등단, 1985년에 ‘자기만의 책상’.
아들 낳을 때까지 딸 넷을 낳은 여성.
그를 이야기할 때 늘 나오는 특징적 내용- 아이 다섯을 키우며 쓰기를 계속한 여성.
일상을 그리는 작가.
그런데/그리고 그녀의 글은 시대를 꿰뚫어보는 글이다.
역사의 시대와 선사의 시대를 넘나들며 생명의 시대를 말한다.
그렇지만 그녀는 사상가로 아직 해석되지 않고 있다.(정윤석 "내게는 박경리가 가장 대단한 사상가인데 왜 3대 사상가 등 이야기 할 때 한번도 거론이 안 되지요?")
글을 아주 잘 쓴 작가이자 다정하고 살림을 좋아한 여성작가로 규정되고 있는 것이 내심 불편하다.
그녀의 작업과 삶을 재조명할 때가 온 듯 하다.
노란집은 이제 작가의 기념관이 되어 후배들을 만나야 할텐데
그 집이 위치한 구리시와 기념관 사업 말이 오가긴 했는데 추진하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큰 딸 호원숙)
그녀가 서울대에서 전시를 하게 된 것도 그녀가 아주 많은 독자를 가진 작가임이 통계로 나왔기 때문.
열정적 팬들이 아주 많은데 연결되어 있지 않아 한적하다.
이 전시를 두고 토론회도 낭송회도 없다.
이제 시작해야 하는 때인지도 모른다.
그 많던 싱아는 다 어디로? 그 많은 여자들은 다 어디로? (2026. 05) (2026. 05, 또문브런치에서 읽기)
※ 박완서아카이브 조성기념전시회 페이지에서 자세한 전시개요, 브로슈어, 도록을 다운로드 받으실 수 있습니다. 특별조성된 이 아카이브는 당초 4월까지만 전시예정이었으나, 다행히도 6월 30일까지로 연장전시하게 되었습니다. 이후에는 이 훌륭한 아카이브를 기록으로만 보실 수 있을지도 모르니 많은 분들의 관람을 추천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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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나눠요
- 또문독서회 회원인 두애린 동인이 <뮤지컬 홍련>에 대한 리뷰를 쓰셨어요. 언젠가 동인들과 이런 작품들 함께 보면 더 뜻 깊을 것 같습니다. <홍련>은 5월 17일까지 상연된다고 해요.
- 지난 달 ⟪쇳돌⟫의 북토크는 참가자도 많았지만 이야기가 정말 풍성하고 감동적이었습니다. 이날 토론을 맡아주셨던 이헌미 동인의 서평은 토론 때도 느꼈었지만, 섬세한 기억, 사람과 역사에 대한 애정과 정성을 다시 한 번 전해주셨어요.
- ⟪남성 판타지⟫의 연장과 변주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K컬처든 정치권이든 최근 'Oppa'/'오빠' 논쟁 또한 가볍게 보아 넘기기 힘들어지는 것 같습니다. 늘 예리한 시선으로 페미니스트 정치경제학적 해석을 해주시는 김주희 동인이 (무산되긴 했습니다만) 개헌 공방 속에서 '광장 이후' 지워진 여성/청년들의 목소리를 다시 불러오는 글을 써주셨어요. 그러고보니 그 광화문광장을 점령한 '받들어총' 조형물까지, 참 갈수록 태산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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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장을 넘지 못한 말들에 귀 기울이며
두애린(또 하나의 문화 동인, 또문독서회 회원)
“소녀의 말은 닿지 않아 담장을 벗어나지 못해” -뮤지컬 <홍련> 넘버, ‘담장 안 소녀’ 中
난무하는 전쟁과 폭력에 관한 소식들 가운데, 그 소식을 마주하는 내 감각이 어느새 무뎌진 걸 발견할 때마다 위기감을 느낀다. 정신을 차려 온 신경을 곤두세운 채 사건들의 진상을 파고 들어가다 보면 그 끝에 상처받고 죽어 나간 작고 약한 존재들의 모습이 너무 자주 보인다.
뮤지컬 <홍련>은 그 약한 존재들을 조명한 작품이다. 장화홍련전과 바리데기 설화의 두 주인공 홍련과 바리를 한데 엮어 만든 창작극이다. 바리는 죽은 영혼들이 모여 심판을 받는 저승 천도정의 주인이다. 이 천도정에, 자신이 아버지와 남동생을 죽였다고 주장하는 홍련이 등장하면서 극은 시작된다. 그리고 초장부터 분노에 찬 홍련의 날 선 곡조를 따라 숨 쉴 틈 없이 이야기가 이어진다.
재판의 형식을 빌려 풀어나가는 이야기는 홍련과 바리를 대립의 두 축으로 두고, 극을 보는 이로 하여금 누구의 말이 옳은지, 누구의 행동에 진짜 ‘명분’이 있는지, 과연 무엇이 진실일지, 그 시시비비를 가려 저마다의 판결을 내리게 만든다. 그렇게 당장 누구라도 비난할 준비가 된 채로 사건에 몰입하던 관객은 극의 후반부에 이르러서야 재판의 진정한 목적이 홍련이 진정 친족을 해쳤는지를 밝혀내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리고 이내 화살이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른 채 당기기 급급했던 시위를 놓아주게 된다.
**스포일러 주의** 재판 내내 강렬한 록 음악에 맞추어 아버지와 동생을 해쳤다며 자랑스레 털어놓던 홍련이 사실 생전 제 손으로 죽인 것은 자기 자신뿐이었다. “죽었어야 해. 죽어야만 네 삶에 관심 갖지.”라는 어느 한 곡의 가사가 무색하지 않게, 홍련의 이야기는 죽음 이전까지 아버지의 집 담장을 넘지 못하였다. 살아생전 장화홍련 자매는 가정폭력에 시달렸고, 홍련은 언니 장화를 위해 나서지 못한 자신의 비겁함에서 비롯된 부채감 때문에 저승에 이르러서도 쉬이 삼도천을 건너지 못한다. 나아가 홍련은 자기 자신마저 속여가며 아버지와 동생을 제 손으로 단죄하였다 주장하지만, 홍련의 증언은 현실에서는 일어나지 않은 일이었다. 억압과 고통의 경험을 자기 파괴의 형태로밖에 분출할 수 없었던 수많은 여성의 삶이 눈앞을 지나갔다.
고통 속에서 스스로를 비난하는 길밖에 찾을 수 없던 홍련에게 위로의 손길을 건넨 건 바리였다. 바리의 천도정 재판은 이 모든 경위를 알고 홍련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준비된 씻김굿의 일부이다. 죽은 자의 한을 풀고 혼을 위로한다는 씻김굿이 절정에 다다를 참에는 관객석 여기저기서 흐느끼는 소리가 새어 나온다. 바야흐로 대혐오의 시대가 열렸다고들 하는데, 손쉽게 누구라도 맹렬히 비판하고 때로는 가차 없이 비난하기 위한 도구를 손에 쥐고선, 홍련과 바리 중 누가 더 그럴만한 명분을 가지고 더 속 시원한 복수를 행했는지 열심히 재고 따지던 작은 머리가, 천도정 재판의 목적을 깨닫는 한순간 얼어붙었다가, 이내 복잡해진다.
장화와 홍련, 그리고 바리의 죽음을 매개로 여러 질문을 던지는 이 작품이 2024년 초연된 창작극임에도 많은 여성, 특히 뮤지컬 장르의 주요 관객인 20~30대 여성들에게 큰 이목을 끌고 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90분에 걸친 공연이 끝나고 나오는 관객들의 얼굴에는 눈물 자국과 함께 어쩐지 홀가분한 표정이 곳곳에 보인다. 씻김이 필요했던 건 홍련뿐이 아니었던 건지. (2026. 05, 또문브런치에서 읽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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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이해하기 위하여: 이라영의 《쇳돌》
이헌미(또 하나의 문화 동인, 서강대학교 사회과학연구소 선임연구원)
최근 한국 사회에서는 부모 세대의 삶을 자식 세대가 사회사적 전기의 형식으로 다시 써내는 작업들이 눈에 띈다. 노명우의 《인생극장》(사계절, 2018)이나 그레이스 M. 조의 《전쟁 같은 맛》(글항아리, 2023)은 그런 흐름을 잘 보여준다. 부모는 누구보다 가까운 존재이지만, 동시에 끝내 완전히 알 수 없는 ‘친밀한 타자’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부모의 생애를 쓴다는 일은 언제든 자식 자신의 자서전으로 미끄러질 위험을 안고 있다.
애초에 전기라는 장르 자체가 한 인간의 개별적 삶을 통해 삶들의 집합으로서의 역사를 서술하고 이해하려는 모순적 기획이다. 더구나 위인이 아닌 평범한 인물, 노동자, 민중, 여성, 곧 ‘무명씨의 전기’는 그 사람이 죽고 난 뒤에는 복원이 거의 불가능하다. 남아 있는 문서도, 기록도, 공적 언어도 희박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아직 살아 있을 때, 그들의 목소리와 그들과 함께 살았던 동료와 가족의 기억을 통해 그 존재를 붙잡으려는 노력은 그 자체로 소중한 정치적·윤리적 실천이 된다.
식민지배, 내전, 분단, 압축적 근대화를 한꺼번에 겪으며 모든 것이 너무 빠르게 변해온 한국 사회에서는 특히 그렇다. 이 사회에서 역사는 너무 자주 거대한 구조와 양극화된 언어로만 서술되어 왔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삶이 증발되었다. 우리에게는, 불문학자 김영욱의 표현을 빌리자면, “망각과 죽음으로 떨어지는 삶을 글로 가로채는 법”이 필요하다. “모두가 자기 삶을 쓰지만 정작 타인의 삶을 쓸 용기와 타인의 삶을 이해할 능력은 점점 희박해지는” 시대에, 이라영의 《쇳돌》은 바로 그 어려운 일을 감행하는 책이다.
이러한 사회사적 전기들이 흥미로운 것은, 그것들이 모두 단지 부모 세대를 회고하는 데 그치지 않고 방법론적인 고투와 실험을 전면에 드러낸다는 점이다. 사료가 충분한 위인의 생애가 아니라, 문서도 기록도 희박한 ‘무명씨’의 삶에 접근하려 할 때, 자식 세대는 우회로를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노명우의 《인생극장》은 파주 미군 기지촌에서 사진관과 미군클럽, 다방을 운영했던 부모의 삶을 부모 사후에야 이해하려는 시도다. 갑작스러운 부모의 죽음과 남겨진 침묵 앞에서 사회학자인 아들은 당대 한국 대중영화들을 매개로 부모를 둘러싼 세계를 상상적으로 재구성한다. 그레이스 조의 《전쟁 같은 맛》 역시 어머니의 말년과 음식, 요리의 기억을 매개로, ‘양공주’였던 어머니의 전쟁 트라우마와 가족 내부의 비밀을 더듬는다. 여기서 음식은 사라진 과거를 직접 말해주지 않지만, 말해질 수 없었던 기억의 우회로가 된다.
그런 점에서 이라영의 《쇳돌》은 또 다른 형태의 방법론적 고투를 보여준다. 이 책 역시 사라지거나 지워질 위기에 놓인 부모 세대와 노동자들의 삶을 복원하려 하지만, 그 매개는 아직 살아 있는 목소리와 현재의 현장이다. 부모와 생존자들을 직접 인터뷰하고, 광산촌 사람들의 기억을 모으고, 폐광 이후의 장소와 여전히 조업 중인 광산 현장을 찾아가는 방식으로 《쇳돌》은 사라지기 전의 삶을 붙잡으려 한다. 그러나 바로 그 살아 있음 때문에 이 책은 또 다른 어려움과 마주한다. 말하는 사람들은 수시로 자신의 이야기를 편집하고, 부모는 많은 이야기를 하면서도 그것이 책 바깥으로 나가려 하면 다시 제동을 건다. 그래서 《쇳돌》은 단지 사라진 삶의 복원에 관한 책이 아니라, 아직 끝나지 않은 관계와 살아 있는 기억을 어떻게 기록할 것인가를 둘러싼 윤리적 협상의 책이기도 하다.
《쇳돌》은 “자문화기술지 형식으로 한 가정의 노동이동사를 분석하는 글”임을 분명히 한다. 저자에게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어떤 노동이 나를 키웠는가”라는 질문과 분리되지 않는다. 이 책이 사적인 가족 회고를 넘어, 부모와 고모, 외가와 광산 노동자들, 그 주변 사람들의 삶을 통해 한국 산업화와 계급 이동, 지역 소멸과 노동의 비가시화를 아래로부터 다시 쓰려는 작업으로 읽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런 문제의식은 디디에 에리봉을 떠올리게 한다. 떠나온 계급 세계를 뒤늦게 돌아보고, 교육과 교양을 통해 자신이 건너온 간극을 사회학적으로 복기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러나 《쇳돌》은 그 계열에 자신을 단순히 안착시키지 않는다. 저자는 노동계층 출신 지식인의 자기기술지에 대해 양가적 감정을 느낀다고 솔직하게 말한다. 왜냐하면 이런 작업은 “쓰는 사람과 읽는 사람 모두 노동자가 아니라 지식인이 된 사람의 안전한 고백”일 수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 자기의식이 《쇳돌》을 계급 상승의 회고담으로부터 떼어놓는다.
동시에 이 책은 ‘아들’이 아니라 ‘딸’이 쓴 책이라는 점에서도 중요하다. 《쇳돌》은 연좌제로 인한 아버지의 고통과 좌절, 노조투쟁을 통해 회복된 공적 자아감, 그리고 굳이 경상도를 고향이라고 자기를 정체화하는 방식까지 포착하면서도, 거기서 멈추지 않고 그와 같은 남성적 노동 서사의 내부에서 다시 삭제된 여성들의 노동과 존재를 함께 복원한다. 고모는 “똑똑한 과외 선생님에서 정신이 이상한 사람으로 옮겨갔고 끝내 유령이 되었다.” 저자는 고모를 “내가 아는 사람 중에서 가장 사회적으로 투명한 존재”라고 부른다. 이 문장 하나만으로도 이 책은 광산노동의 기록을 넘어, 산업화와 가족의 역사 속에서 존재하면서도 존재하지 않는 사람처럼 취급된 여성들의 문제로 나아간다.
실제로 이 책의 중요한 성취 중 하나는 광산노동이라는 범주를 다시 정의한다는 데 있다. 광산은 산업화 시대 이래 오늘날까지 전형적 이미지처럼 반복되어온 남성 광부의 막장 노동만으로 유지된 것이 아니었다. 쇳돌을 고르는 선광부의 노동, 광산 간부와 노동자들의 밥을 짓고 도시락을 싸는 일, 생계를 위한 각종 부업, 수많은 광산촌 여성의 노동과 투쟁이 그 세계를 함께 구성했다. 1부 14장 <언니들>에 등장하는 젊은 여성 경리 직원들은 노조 민주화 과정에서 회계 부정의 목격자이자 자료 제공자로 협력한 이들이었다. “걔네들이 진짜 보통이 아니야. 겁이 없더라고.”라는 회고는, 이 여성들이 광산의 주변 인물이 아니라 역사적 행위자였음을 환기한다. 광산노동이 사회적으로 비가시화되어 왔다면, 그 안에서 여성의 존재는 다시 한 번 더 깊이 삭제되어 왔다. 《쇳돌》은 바로 그 이중의 삭제를 복원한다.
《쇳돌》의 독특한 구성 역시 주목할 만하다. 책의 1부와 2부는 가족의 노동이동사와 폐광 이후의 삶을 다룬다. 3부 <주검 위에 쌓은 문명>은 광산 노동자의 몸을 소모재로 취급하고 그 죽음을 애도할 가치 없는 생명으로 배치해온 산업국가의 폭력을 비판한다. 이어 4부 <목소리들, 들을 수 있을 때 듣기>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광산촌 지인 생존자들을 인터뷰한 기록으로 채워지고, 5부 <‘없어질 직업’의 사람들>은 폐광 이후 탄광촌의 삶과 현재에도 조업 중인 광산 현장을 직접 찾아간 르포로 확장된다. 한 권의 책으로 놓고 보면 분명 분절적이다. 그러나 그 분절성은 이 책의 약점이 아니라 형식적 필연성이다. 가족사, 비평, 구술기록, 현장 르포가 한꺼번에 놓일 때에만 광산을 둘러싼 세계의 구조적 폭력과 그 안에서 살아낸 사람들의 삶의 결이 비로소 입체적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쇳돌》은 선형적인 서사라기보다 서로 다른 시간과 목소리, 몸과 장소를 한데 배치해 감각적·정치적 전체를 구성하는 하나의 설치작업처럼 보인다. 미술가이자 예술사회학자인 이라영의 정체성을 생각하면, 이 인상은 더욱 자연스럽다. 따라서 《쇳돌》을 1부와 2부의 가족 서사에만 집중해 읽는다면, 이 책을 읽는 데 우리는 실패하는 셈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쇳돌》이 부모를 쓰는 책이면서도 부모에 머물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부모의 생애사를 다루는 작업은 자식의 기억과 부모의 삶에 대한 전기적 서술이 뒤엉킬 수밖에 없다. 그래서 자칫하면 부모의 전기는 자식의 자서전이 된다. 그런데 《쇳돌》은 가족 바깥으로 나아간다. 폐광 이후 흩어진 사람들, 광산촌의 생존자들, 아버지의 동료들, 지역의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어오면서 부모는 더 이상 단독의 주인공이 아니다. 부모는 하나의 세대이자 하나의 노동세계, 하나의 집단적 조건을 통과한 존재로 다시 위치 지워진다. 이때 이 책은 가족 회고록을 넘어 구술 아카이브와 집단 전기의 성격을 획득한다. “광산은 닫혀도 삶은 계속된다”라는 문장, 그리고 “비슷한 듯 다른 각각의 삶이 더 소멸하기 전에 ‘들을 수 있을 때 듣기’를 실천해야 한다”는 선언은 이 책의 핵심을 잘 보여준다. 《쇳돌》은 사라진 세계를 애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아직 살아 있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붙잡음으로써 망각을 유예하려 한다.
후기에서 이라영은 “아름다운 세상은 싸움이 없는 세상이 아니라 싸울 수 있는 세상이다. 싸울 수 없는 관계가 비극”이라고 쓴다. 또한 자신의 작업을 “혀가 없다고 취급받은 사람들의 말을 듣고 그 목소리를 정리하는 작업”이라고 적는다. 이 문장은 《쇳돌》 전체를 요약한다. 이 책의 감동은 누군가를 대신 말해주는 데서 오지 않는다. 오히려 이미 말하고 있었지만 누구도 들어주지 않았던 사람들의 말이, 비로소 하나의 책 안에서 자리를 얻게 된다는 데서 온다. 그래서 《쇳돌》은 광산의 책이자 가족의 책이고, 동시에 애도와 기억, 계급과 젠더, 아카이브와 재현의 윤리를 둘러싼 책이다. 부모를 통해 사회를 읽는 일은 흔히 너무 사적이거나 너무 미화되기 쉽다. 그러나 《쇳돌》은 사적인 기억을 사회적 열쇠로 바꾸고, 가족의 애도를 집단적 아카이브로 확장한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무명씨의 전기’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드물고도 귀한 성취다. (2026. 05, 또문브런치에서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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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계란과 케첩으로 쓴 항의, 헌법을 다시 쓰기
김주희(또 하나의 문화 동인, 덕성여대 차미리사교양대학 교수)
여대에서 여성학을 가르치고 있다. 내가 속한 환경의 특수성 때문이겠지만, 학부생들을 가르치는 현장에서 교육이나 실천, 특정한 문제의식을 통해 축적된 변화가 학생 개인의 삶 속에서 어떻게 이어지는지 장기적인 추적이 어렵다. 변화된 이들이 지금 어떤 문제의식에 도달해 있는지 한눈에 파악하기 쉽지 않은 측면이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현재의 학생 집단이 지닌 정서와 태도의 변화는 비교적 즉각적으로 포착된다. 개인 내부에 축적되는 변화는 잘 보이지 않지만, 집단의 기류가 바뀌는 순간은 빠르게 감지되곤 한다.
윤석열의 비상계엄 이후 뜨거운 광장이 열렸던 2024년 12월 무렵과 비교하면, 지금 캠퍼스에서 만나는 학생들 사이에는 분명 다른 공기가 흐른다. 광장에서 확인했던 연대의 감각이 현실의 낡은 질서와 충돌하며, 무엇을 잃어버렸는지조차 명확히 알 수 없는 일종의 정치적 멜랑콜리 상태랄까. 짙은 환멸의 그림자. 여하튼 이들은 ‘짜게 식었다.’
2024년 광장이 열린 시간, 학생들은 일사불란했다. 윤석열 탄핵 소추안이 국민의힘 국회의원들의 퇴장으로 무산되던 다음 날이었던가. 기말고사를 목전에 둔 강의실이 휑했다. 한 학생은 수업 시작 직전인데 대학 정문을 향해 뛰어가며 지금 친구들이 김재섭 의원 사무실 앞에 모여있다고 말했다. (김재섭은 서울 도봉갑 국회의원이고, 덕성여대는 도봉구에 위치한 유일한 대학이다.) 사방으로 흩어진 이들은 각자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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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욱, 〈“김재섭 뽑은 손 자르고 싶어”, 대학교선 ‘표결불참’ 시험문제...난리 난 도봉구〉, 《오마이뉴스》, 2024.12.09.
“교수님, 제가 김재섭 잡아 올게요! ” 소리치며 달려가는 학생의 배낭에는 흡사 광선검처럼 보이는 깃대 두 자루가 꽂혀 있었다. 학생들은 자신들이 살고 공부하는 바로 그 동네에서, 주민들과 함께 지역 국회의원에게 목청 높여 책임을 물었다. 나중에 들으니, 시장에 다녀오던 한 ‘할머니’가 학생들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고, “여기가 김재섭 의원 사무실이에요”라는 말을 듣곤 방금 사 온 계란 한 판을 내놓았다고 한다. 의원 사무실 앞엔 붉은 토마토케첩이 발라져 있었다. 케첩 역시 장바구니에서 나왔으리라 추측할 뿐이다.
김 의원 사무실 앞에는 날계란이 날아들어 줄줄 흘렀고, ‘내란동조 내란부역자 김재섭’, ‘국민은 절대잊지 않는다’, ‘탄핵 표결 불참 김재섭 의원에게 삼가 조의를 표합니다’, ‘인스타 깔짝 페북 깔짝 시간 많은데 투표는 왜 안 함?’이라고 적힌 근조화환들이 속속 도착했다. (중략) 김 의원 사무실 앞에 모인 인원의 절반 정도는 60대 이상 노년층, 절반 정도는 20~40대로 보였다. 도봉구의 평균연령은 47.9세로, 서울 25개 구 중 강북구(48.4세)에 이어 가장 나이든 지역에 해당한다(서울 전체 평균연령 44.7세). 이를 고려하면 상대적으로 젊은 층이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도봉구에 위치한 덕성여대 학생들도 수십 명이 함께 모여 규탄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 김성욱, 〈“김재섭 뽑은 손 자르고 싶어”, 대학교선 ‘표결불참’ 시험문제...난리 난 도봉구〉, 《오마이뉴스》, 2024.12.09.
당시 학생들의 활약은 SNS를 뜨겁게 달구었고, 서울 최북단에 위치한 덕성여대의 학생들은 ‘북부대공’으로 불렸다. 북부대공은 북부를 지배하는 압도적 카리스마의 최고 권력자로, 보통 서브컬처 장르에서 창백한 피부와 날렵한 턱선을 지닌 냉혹한 미남으로 그려진다. ‘여학생’들을 강력하고 멋진 로판 남주(로맨스 판타지 남자 주인공) 서사로 전환한 이러한 즐거운 밈적 유희에 대해 학생들과 이야기 나눌 여유도 없이, 광장은 장기화되었다. 추운 겨울 거리에 나부끼는 학교 깃발, 동아리 깃발을 보면서 안부를 가늠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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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시각 적지 않은 남성들은 “현생 살기도 바쁘다”며 주식 그래프를 보고 있었다. (김주희, 〈 동일성을 넘어 동시성으로, 대중화 시대의 페미니즘 정치와 이동하는 현장〉, 《사이間SAI․》, 제39호, 2025, 24쪽.) 이것은 비난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진술이다. 계엄이라는 정치적 사건을 경제적 리스크로 환산하는 손익 계산의 감각과 계산적 태도는 가부장제의 적자(嫡子)들에게만 허락된 합리성이 아닐 수 없다. 이들에게 광장은 선택지일 뿐이다. 하지만 “TK의 콘크리트는 TK의 딸들에 의해 부서질 것이다”는 절절한 대자보를 접하면서, 광장이 선택지일 수 없었던 광선검을 꽂고 달려가는 학생의 뒷모습이 떠올랐다.
이탈(exit)하지 않고 남아(loyalty) 항의하는(voice) 여성들. 일찍이 앨버트 허시먼이 분석한, 조직과 국가가 쇠퇴할 때 구성원이 취하는 ‘이탈(exit)’, ‘항의(voice)’, ‘충성(loyalty)’의 삼각 구도는 이러한 2030 여성과 남성의 상반되는 대응을 설명하기 적절해 보인다.(앨버트 허시먼, 《떠날 것인가, 남을 것인가: 퇴보하는 기업, 조직, 국가에 대한 반응》, 강명구 옮김, 나무연필, 2016.) 그에 따르면 이탈은 가장 비용이 덜 드는 즉각적인 대응으로 간주된다. 오늘날 ‘엑시트’가 투자금을 회수하고 이익을 실현하는 행위를 의미함을 떠올릴 때(2026년 3월 6일 금융노동연구회F의 『크랙업 캐피털리즘』 세미나 토론에서 제기된 논의에 착안하였다.) 2030 남성들에게 ‘이익 실현으로서의 엑시트’는 동시대 지배적 강령으로 작동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은 공적 공동체에서 발을 빼고 개인의 생존과 자산 증식이라는, 사적 영역으로 자원을 집중시키는 전략적 선택을 감행하고 있다.
반면 여성들의 행보는 ‘충성’을 전제로 한 ‘항의’로 요약된다. 국가라는 공동체에 대한 맹목적인 애착이 아니라, 시스템의 붕괴를 막고 내부로부터의 개혁을 만들어 내려는 적극적인 실천의 의미를 지닌다. 이들은 시스템 밖에서 이익을 실현하는 대신, 모순된 구조를 정면으로 마주하고 뿌리내린 채 새로운 정치 질서를 요구한다. 이런 맥락에서 지난 광장은 개인의 최적화를 추구하는 이들과 미래의 가치를 복구하려는 여성들이 퇴보하는 사회를 대하는 상반된 태도를 선명하게 드러낸 공간이었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하지만 2025년 4월 4일 헌법재판소의 대통령 파면 결정과 6월 4일 이재명 대통령 당선을 지나면서 ‘익숙한 실망’의 시간이 이어졌다. 2030 여성들의 광장에서의 압도적 활약과 이들 유권자들의 선거에서의 압도적 지지는 그저 반짝 화제가 되었을 뿐, 우리 사회를 성찰하는 지표가 되지 못했다. 이재명 정부 첫 내각에서 여성 장관 비율은 20%에 그쳤고, ‘내란 청산’이라는 정치적 구호 속에서 여성 의제는 주변으로 밀려났다. 처벌이 곧 청산이라는 논리는 국가가 시민의 항의를 어떻게 해석하고 미래를 함께 설계할 것인지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을 지워버린다. 윤석열은 퇴장했지만, 한국 사회는 여전히 성평등을 구조적 과제로 받아들이지 못한 채 갈등의 부산물로 밀어내고 있다. 성평등가족부 출범 이후, 성평등정책관 산하 ‘성형평성기획과’ 라는 괴랄한 조직이 신설된 것이 대표적이다. 그것이 “남성 차별 부분을 연구하고 대책을 마련하라”는 남성의 ‘역차별’을 우려한 대통령 발언 이후 설계된 것임은 누구나 알 수 있다.
비교적 차분해진 지금 교실에서 학생들은 종종 광장의 경험을 이야기하곤 한다. 여성학 교실이었던 작은 광장들과 ‘남태령’이 이들을 또 다른 여성학 교실로 이끌었다고 한다. 몇 번의 날카로운 분노가 교실에 일렁이던 때가 있었는데, 언뜻 기억나는 순간은 (또! ) 김재섭 의원의 정원오 당시 서울시장 예비후보를 겨냥한 ‘여성 직원과의 칸쿤 출장 의혹’ 발언 직후였다. 그리고 얼마 전 정청래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하정우 후보의 “오빠 해봐요” 발언 역시 짜게 식은 학생들을 반발하게 했다. “국회의원이 되고 싶으면 ‘국회의원이라 불러봐’ 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학생들은 강한 거부감을 드러냈다.
“우리는 진보의 치어리더가 아니다”라는 구호가 등장한 지 15년이 흘렀다. 정치권과 국가의 응답 부재에 일찌감치 실망한 여성들은 거대 양당 정치에 대한 기대를 거둔 지 오래지만, 불과 얼마 전 해방구로서의 광장을 경험한 소위 ‘응원봉 세력’ 2030 여성들은 그렇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이재명 당시 대선 후보에 가장 많은 표를 몰아주었고 “큰 조직”에서 ‘진짜 변화’를 만들어 보고자 민주노총에 대거 가입하기도 했다.(김주희, 위의 책, 20쪽.) 아마 이번 6.3 지방선거에서도 2030 여성들의 ‘표심’은 분명히 주목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정부에 항의(voice)를 멈출 수 없다.
지금 국회에서는 헌법 전문 개정과 계엄 통제 강화를 중심으로 한 헌법 개정 논의가 이어지고 있지만, 민주주의는 내란 세력을 처벌하는 법 기술만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광장의 민주주의가 전혀 해석되지 못하는 상황에서, ‘윤석열 방지법’이라는 협소한 프레임에 갇힌 개헌 논의는 또 다른 남성 권력의 헤게모니 싸움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5·18 정신의 헌법 전문 수록 논의 역시 마찬가지다. 그것은 무엇을 민주주의의 정신으로 호명할 것인가를 둘러싼 의미 투쟁의 문제다. 이런 측면에서 주먹밥은 광주의 지역적 미담이나 상징 음식이 아니라 돌봄과 연대의 ‘정신’으로 이해되어야 하지 않을까.
많은 여성과 소수자들이 윤석열 퇴진 광장의 자유발언대에서 5·18 광주, 세월호, 이태원을 언급했다.(최나현·양소영·김세희, 《백날 지워봐라 우리가 사라지나》, 오월의봄, 2025.) 이들은 서로 다른 두려움과 국가폭력의 기억을 현재의 광장 안에서 다시 연결하고자 했다. 내란을 방지한다는 것은 단지 더 강한 법과 통제 장치를 만드는 문제가 아니다. 돌봄의 철학을 국가 운영의 핵심 원리로 사유하는 것, 광장을 통해 갱신된 민주주의를 공동체적 연대를 가능케 한 돌봄의 정치로 재해석하는 것, 케첩과 날계란, 응원봉으로 상징화된 항의뿐 아니라 넝마주이, 황금동 콜박스 여성들, 구두닦이, 날품팔이의 얼굴로 5·18 정신을 기록하는 것. 지금의 개헌 논의는 민주주의의 경험과 가치를 누구의 언어로 남길 것인가라는 질문까지 나아가야 할 것이다. (2026. 05, 또문브런치에서 읽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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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또문소식은 여기까지입니다. 우울한 뉴스들도 많았지만, 참여해준 동인들의 모든 글 끝에는 여전히 함께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보자는 제안과 기대가 들어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또문과 함께 도모해보시면 어떨까요?
오늘 또문의 메일함에는 '후원의 날'을 준비하는 또문이웃단체들의 초대장들이 들어와 있었어요. 동인들의 자발적인 증여로 시작했던 또문이기에 또문이 '후원의 날'을 기획한 적은 별로 없었는데요, 그래도 동인들의 후원은 늘 중요하고 지금은 더욱 그렇습니다. 현재는 월1만원 후원회원을 기본으로 제안하고 있는데, 실은 1만원 이상으로 CMS신청을 해주시는 분들도 계세요. 또문소식을 받아보고 계신 여러분! 아직 후원회원이 아니시라면 신규가입을, 이미 후원회원이시라면 증액신청을 하실 때가 되셨답니다. 그리고 또문소식에서 함께 나눌 여러분의 글도 언제나 기다리고 있는 것, 잊지 말아주세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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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문화를 후원하고 계신 동인들
후원회원(가나다순): 곽영선, 권김현영, 김경희, 김미현, 김보화, 김상애, 김성례, 김소영, 김신현경, 김영경, 김영옥, 김영일, 김유익, 김은실, 김정명신, 김정은, 김정희원, 김주희, 김찬호, 김태형, 김현미, 김혜련, 김효정, 김희옥, 남정호, 두애린, 문수복, 문정주, 박나미, 박은, 박진숙, 박총, 배채은, 백경흔, 변재란, 소영, 손은정, 신유리, 안혜경, 안희경, 안희옥, 양선미, 양현아, 여은영, 연주희, 우은희, 유승희, 이경자, 이선향, 이소희, 이수정, 이숙경, 이은아, 이은주, 이정주, 이지예, 이진아, 이헌미, 이현주, 이혜령, 장필화, 전유나, 정진경, 정혜란, 정혜진, 정희진, 조민아, 조옥라, 조은, 조형, 조한혜정, 지현, 진영옥, 채혜원, 최소연, 최수연, 최은숙, 최은주, 최한솔, 한혜정, 허순희, 현유라, 황은진(83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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