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한가위를 앞두고 있습니다. 훌쩍 하늘이 높아지고, 일교차가 커지고, 선선한 아침바람과 낮시간의 뜨거운 햇볕을 느끼며 들녁의 형편이 궁금해졌는데, 역시 지난 여름의 폭염과 고온현상으로 수확량이 급감하였다는 뉴스를 보게 됩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를 여전히 편하게 말할 수 없는 것 같지만, 명절 기간 천천히 읽으실 수 있을 글들을 전합니다. 이 달에도 또문 필진들께서 좋은 글들을 보내주셨는데, 독자들께서도 언제든 원고 보내주셔도 되는 것 잘 아시고 계시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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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또문소식은 아래 순서로 쓰여졌습니다.
- 또문독서회 9-10월 소식
- 지금 여기에 : 최수연, "이주돌봄노동의 교육화와 여성주의적 쟁점"
- 함께 나눠요 : 김정은, "혼란을 말하는 일"
반하라, "놀란의 오디세이: 권능과 역량을 잃은 여성인물들" 김은실, "놀란의 오디세이: 반하라 동인의 글에 이어쓰기"
- [동인 동정] 안이희옥, 김찬호 새 책 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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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의 책은 로런 벌랜트의 ⟪잔인한 낙관⟫입니다. 독서회 회원들 가운데 좀 멀리 살고 계시는 분들이 계셔서 실험적으로 9월부터는 한 번은 온라인(줌)으로, 한 번은 대면으로 번갈아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첫 온라인 모임은 9월 14일에 이미 진행이 되었어요. 3주에 한 번씩 진행하기로 했는데, 이번 달은 추석을 지나다보니 다음 모임이 10월 5일입니다. 언제든 연락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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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에
- 최수연 동인께서 외국인요양보호사 양성대학 시범사업에 대한 여성주의적 쟁점을 분석한 글을 써주셨습니다. 돌봄당사자-제공자에 대한 사회적 지원과 환경에 대한 질문이 이제야 시작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와중, 이미 K-돌봄과 글로벌 노동시장이 연결되고 있는 현실, 그 중에서도 대학에서 관련학과를 설치하여 시범사업으로 운용되기 시작한 내용을 들여다보는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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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돌봄노동의 교육화와 여성주의적 쟁점
최수연 (또 하나의 문화 동인, 한국학중앙연구원 사회학 전공 조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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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돌봄과 외국인 요양보호사
팬데믹 시기에 “K-방역”이 한국의 방역 체계를 상징하는 말로 쓰였다면, 최근에는 “K-돌봄”이라는 표현이 정책 영역에 등장하고 있다. “K-돌봄”의 “K”는 급속한 고령화, 저출산, 1인 가구 증가와 같이 한국의 돌봄 정책이 놓여 있는 구체적 조건을 가리키는 동시에, 한국의 돌봄 정책이 더 이상 국내 문제에만 머물지 않고, 글로벌 돌봄노동 시장과 깊이 연결되고 있음을 암시한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최근 시행되고 있는 외국인 요양보호사 양성대학 시범사업은 주목할 만하다. 이 사업은 외국인 유학생을 모집해 대학에서 관련 교육을 받게 한 뒤, 요양보호사 자격 취득과 노인요양시설 취업으로 연결하는 제도이다. 2026년 1학기부터 시행된 이 사업은 2026년 한 해 총 1,092명의 학생 모집을 계획하고 있으며, 2년 교육과정이 끝난 뒤 평가를 거쳐 제도화 여부를 검토할 예정이다. 이 글에서 나는 외국인 요양보호사 양성대학 시범사업에서 새로운 것이 무엇인지, 그것이 갖는 여성주의적인 쟁점이 무엇인지를 간단히 살펴보고자 한다.
유학생에서 요양보호사로
외국인 요양보호사 양성대학 시범사업의 가장 큰 특징은 대학이 외국인 돌봄노동자를 길러내는 핵심 기관으로 등장한다는 점이다. 기존의 외국인 노동자 도입 방식은 대체로 이미 노동자로 선발된 사람을 한국의 사업장과 연결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이 사업에서는 순서가 다르다. 외국인은 먼저 학생으로 한국에 들어온 뒤 교육을 받고, 요양보호사 자격을 취득하며, 졸업 후에는 취업과 체류자격 전환을 준비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대학은 단순히 수업을 제공하는 곳에 머물지 않는다. 외국인 학생을 모집하고 선발하며, 한국어와 전공 교육을 제공하고, 출석과 생활을 관리하며, 자격증 취득과 취업까지 연결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다시 말해 대학은 교육기관이면서 동시에 외국인 돌봄 인력을 양성하고 관리하는 기관이 되는 것이다. 이전에는 정부가 주도하던 외국인 인력 도입과 관리의 일부가 대학으로 옮겨오고, 정부는 이러한 대학의 교육·관리 체계를 평가하고 감독하는 방식으로 개입하게 된다.
이 시범사업의 또 다른 특징은 외국인 유학생이 대학에서 배우는 것이 요양보호 관련 지식과 기술에만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들은 요양보호사 자격을 따기 위한 교육을 받아야 할 뿐 아니라, 자격시험을 보기 위해 한국어를 익혀야 한다. 또한 한국의 생활문화와 돌봄 현장에도 적응해야 하며, 졸업 후에는 취업처를 찾고 체류자격 변경 요건도 충족해야 한다.
다시 말해 교육과정을 통해 요구되는 것은 돌봄지식 만이 아니라, 한국어와 한국문화를 익히고, 한국의 돌봄현장과 지역사회에 적응하여 생활하고 일할 수 있는 사회적 역량도 필요하다. 또한 이 과정에서 유학생은 장래의 취업과 체류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학업과 한국에서의 생활을 꾸준히 계획하고 조절해야 한다. 외국인 요양보호사 양성대학 시범 사업의 제도는 유학생이 돌봄 자격, 언어능력, 현장 적응력, 그리고 자기 관리 능력을 갖춘 ‘유용한’ 이주 돌봄노동자로 전환되도록 설계되어 있다.
전문성 인정과 노동권의 문제
나는 이처럼 대학 교육을 통해 이주 돌봄노동자를 길러내는 방식을 “이주돌봄노동의 교육화”라고 부르고자 한다. 이러한 이주, 교육, 그리고 노동의 제도적 접합은 돌봄노동의 전문성을 어떻게 인정할 것인지, 그리고 이주 돌봄노동자가 어떤 조건에서 일하게 될 것인지에 대한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우선 이주돌봄노동의 교육화는 돌봄노동의 전문성을 드러낼 가능성을 갖는다. 그동안 아이를 돌보고, 아픈 사람을 간병하고, 노인을 보살피는 일은 전문적인 노동이라기보다 여성의 역할로 이해되어 왔다. 여기에 이주가 결합되면, 특정 국가와 문화 출신의 이주여성이 돌봄에 더 익숙하거나 더 잘 견딜 것이라는 기대가 덧붙기도 한다. 이런 점에서 대학 기반의 양성 방식은 돌봄노동에 대한 성별화되고 인종화된 편견에 문제를 제기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교육과 자격이 강화된다고 해서 돌봄노동의 가치가 자동으로 높아지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돌봄의 전문성으로 인정할 것인가이다. 돌봄의 전문성을 의료, 재활, 보건 지식처럼 이미 전문직으로 인정받는 영역에만 한정한다면, 식사와 배설을 돕고, 몸을 이동시키고, 신체를 접촉하고, 정서적으로 소통하는 일상적인 돌봄은 여전히 “누구나 할 수 있는 일”로 낮게 평가될 수 있다.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이런 일상적 돌봄 안에 들어 있는 지식, 숙련, 신체적·관계적 능력을 제대로 인정하고 평가하는 사회적 기준을 세우는 일이다.
또한 이러한 대학 기반 이주 돌봄노동자 양성 방식은 이주 돌봄노동자를 국가자격과 근로계약을 갖춘 장기요양 영역으로 연결한다는 점에서 노동자 보호의 가능성도 갖는다. 비공식 간병노동은 장시간 노동과 통상적으로 주거 비용을 아낄 수 있는 노동 형태이기 때문에 단기간 많은 소득을 모을 수 있다는 점에서 선호되는 측면도 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간병 노동자를 보호할 수 있는 조치는 거의 부재한다. 이에 비해 외국인 요양보호사 양성 사업은 제도화된 장기요양 체계 안에서 이주 돌봄 노동자의 지위와 권리를 분명하게 만들 수 있는 변화이다.
하지만 기존 요양보호사들이 처한 노동조건, 즉 저임금, 불안정한 고용, 높은 노동강도와 낮은 사회적 평가가 그대로라면, 외국인 요양보호사 도입은 이주 돌봄노동자의 권리를 제도적으로 보장하기보다 단기적인 인력 보충에 머물 수 있다. 이 경우 요양보호 노동조건을 근본적으로 개선해야 한다는 과제는 뒤로 밀릴 우려가 있다. 더구나 외국인 요양보호사는 체류자격이 취업과 연결되어 있어, 부당한 대우를 받아도 일을 그만두거나 다른 일터로 옮기기 어려울 수 있다. 열악한 노동조건이 유지된 채 특정 이주집단을 별도의 체류자격 경로를 통해 지속적으로 충원할 경우, 기존의 성별화된 돌봄노동의 가치절하에 더해 국적과 체류지위에 따른 노동시장의 인종화된 분절이 더욱 심화될 수 있다. 따라서 외국인 요양보호사 도입은 요양보호사 전반의 노동조건 개선과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돌봄의 미래
외국인 요양보호사 양성대학 시범사업은 한국 사회의 돌봄 위기가 새로운 단계에 들어섰음을 보여준다. 이제 외국인 유학생은 대학 교육, 자격 취득, 취업, 체류자격 전환을 거쳐 미래의 돌봄노동자로 길러지고 있다. 이 변화는 가능성과 위험을 동시에 갖는다. 한편으로는 돌봄노동을 교육과 자격을 갖춘 전문적인 일로 인정하고, 이주 돌봄노동자의 노동권을 제도적으로 보호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돌봄노동에 대한 낮은 사회적 평가, 낮은 임금, 높은 노동강도라는 조건을 그대로 둔 채, 그 일을 맡을 새로운 외국인 노동자를 계속 공급하는 방식에 머물 위험도 있다. 따라서 이주돌봄노동의 교육화가 한국 돌봄의 의미 있는 대안이 되려면, 외국인을 얼마나 많이 데려올 수 있는가보다 돌봄노동을 얼마나 존중할 수 있는가를 먼저 물어야 한다. 결국 K-돌봄의 핵심은 새로운 인력을 찾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돌봄을 받는 사람과 돌봄을 제공하는 사람 모두가 존중받는 사회를 만드는 데 있다.
(2026. 09, 또문브런치에서 읽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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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나눠요
- 김정은, 반하라, 김은실 세 분의 글을 전합니다.
- 김정은 동인은 또문동인지과 동인회보 등 또문의 글쓰기 실천을 연구해온 연구자로서 아기를 낳은 뒤 달라진 많은 조건들 속에서 연구자로서, 글쓰는 사람으로서 어떤 경험을 하고 있는지 '또문동인지'식의 글을 보내주셨습니다.
- 반하라 동인과 김은실 동인의 글은 지난 여름 개봉되어 천만관객을 달성하였다는 놀란 감독의 영화 ⟪오디세이⟫에 대한 홍미로운 글들입니다. 반하라 동인의 페미니스트적인 날카로운 비평이 먼저 있었고, 김은실 동인이 그 비평에 대해 이어쓰기를 보내주셨습니다. '이어쓰기'는 늘 환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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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란을 말하는 일
김정은(또 하나의 문화 동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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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임신하고 만삭이었을 때 또문 운영위원 모임에 간 적이 있다. 열 명 남짓한 동인들이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던 중, 어쩌다 보니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 임신을 경험한 사람이 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물론 그것을 어떤 문제라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배가 잔뜩 부른 채 앉아 있던 나는 문득 내가 속해 있다고 생각했던 이곳에서 조금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은 이질감을 느꼈다. 그리고 아주 잠시 이런 생각을 했다. 내가 뭔가 잘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이를 낳은 뒤에도 ‘내가 뭔가 잘못하고 있는 걸까’라는 질문은 종종 돌아왔다. 다만 그 질문이 생겨나는 이유는 조금 달랐다. 주로 내가 뒤처지고 있다고 느낄 때였다. 아이를 낳고도 강의를 하고 연구도 계속했지만, 이전과 같은 속도로 살 수는 없었다. 연구자로서 계속 무언가를 읽고 쓰며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시간 속에서 나만 속도가 느려진 것 같은 조바심이 들었다. 사실 그것을 차분히 생각할 겨를도 별로 없었다. 하루하루 해야 할 일을 처리하고 아이와 씨름하다보면 녹초가 되어 무언가를 오래 읽거나 생각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았다.
혼란한 와중에 아이가 돌 무렵 시작한 『여성신문』 스터디에서 이러한 나의 상황과 감정을 비추어볼 수 있는 이야기들을 접하게 되었다. 정혜진 동인 그리고 다른 한국문학 전공자들과 함께 1988년에 창간된 『여성신문』을 읽기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그저 연구 자료로 읽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어떤 대목들에서는 눈길이 오래 머물렀다. 가령 『여성신문』 21호에는 「일 가진 엄마의 죄없는 죄책감」이라는 제목의 대담이 실려 있다. (박효신 정리, 박혜란·신경숙, 「일 가진 엄마의 죄없는 죄책감」, 『여성신문』 21, 1989.04.28., 16쪽.)
제목부터 묘하게 마음에 걸렸다. ‘죄없는’ 줄 알면서도 ‘죄책감’을 느끼는 마음. 일을 계속하면서도 아이에게 마음이 쓰이고, 자신의 일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으면서도 가족에 대한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해 안절부절못하는 여성들의 이야기가 그 안에 있었다. 삼십여 년 전 여성들의 삶과 나의 삶은 분명히 다른데도, 그들이 말하는 감정의 어떤 대목에는 뜻밖에도 지금의 내가 닿을 수 있는 지점이 있었다.
그 사실은 조금 이상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내가 읽은 1980년대 후반의 『여성신문』에서도 여성에게 집중된 가사와 양육의 부담을 문제 삼고, 여성들이 가정 밖에서 일하고 활동할 수 있도록 ‘탁아’를 비롯한 제도적 뒷받침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슈퍼우먼 신드롬’과 같은 정동적 징후를 통해 일과 모성을 함께 수행해야 하는 여성들이 겪는 압박감 역시 문제로 다루고 있었다. (창간 초기 『여성신문』이 ‘정경화 신드롬’과 ‘슈퍼우먼 신드롬’ 등의 정동적 징후를 포착하고, 여성들의 일상적 경험과 감정을 공적 문제로 구성하는 방식에 대해서는 다음 논문에서 다루었다. 김정은, 「『여성신문』 창간 초기의 주부 기획과 그 함의」, 『여성문학연구』 68, 한국여성문학학회, 2026.)
그때와 비교해 여성의 노동과 돌봄을 둘러싼 법과 제도도 크게 달라졌고, (김미지는 1980년대 후반 이후 남녀고용평등법과 영유아보육법의 제정, 육아휴직제의 확대, 호주제 폐지 등 여성의 노동과 가족생활을 둘러싼 법과 제도의 변화를 짚으며, 이러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공지영의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1993)와 조남주의 『82년생 김지영』(2016)에 나타난 서로 다른 세대 여성들의 생애사적 경험에서 유사한 젠더 문제가 반복되는 양상에 주목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들을 ‘여성 서사’의 계보 속에서 읽을 때 상호텍스트적 의미망을 지닐 수 있다고 보았다. 김미지, 「『82년생 김지영』(2016)과 겹쳐 읽은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1993)―페미니즘과 소설의 전략」, 『현대소설연구』 85, 2022, 8-10쪽.) 여성들이 결혼과 출산 이후에도 자기 일을 지속하는 삶 역시 이전보다 익숙한 것이 되었다. 많은 것이 달라졌는데도, 나는 왜 그들이 말하는 죄책감에서 내 마음의 일부를 발견했던 것일까.
문제를 인식하는 것과 그 문제 속에서 어떤 감정적 상태가 되는 것은 서로 다른 일이었다. 나 역시 여성에게 돌봄의 책임이 집중되어온 역사와 모성과 자기희생을 결부시키는 규범에 대해 오랫동안 읽고 써왔다. 하지만 그것을 안다고 해서 어떤 감정에서 곧바로 자유로워지는 것은 아니었다. 우리 집에서는 남편이 주양육자이며, 나는 바깥 활동을 남편보다 더 많이 하는 편이다. 주변에서는 논문을 쓰려면 주말에도 남편에게 아이를 맡기고 도서관에 가라고 한다. 아주 합리적인 조언이다. 그런데도 나는 그렇게 좀처럼 하지 못한다. 평일에도 아이와 많은 시간을 보내는 남편에게 주말까지 아이를 맡기는 것이 미안하고, 아이에게도 미안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이런 죄책감은 그저 마음에 머물러 있는 것만은 아니었다. 나는 아이와 충분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 남편에게 너무 많은 몫을 맡기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자주 점검하고 헤아린다. 주말에 도서관에 갈지를 결정하는 사소한 일 앞에서도 이번 주에는 아이와 얼마나 시간을 보냈는지, 남편은 얼마나 지쳐 있는지를 생각하게 된다. 그와중에 아이를 낳은 뒤 줄곧 나를 조바심 나게 했던 연구자로서 뒤처지고 있다는 감각도 한편에서 작동한다. 가족과 시간을 보내면서도 써야 할 논문과 읽지 못한 글이 마음에 걸린다. 서로 다른 방향에서 생겨나는 감정들이 내가 시간을 어디에 얼마나 쓸 것인지에 개입하고, 나는 그 사이에서 자꾸 적당한 지점을 찾으려고 한다.
여기에 또 다른 생각이 끼어들기도 한다. 남성 연구자들도 자신의 일을 위해 가족과 보내는 시간을 줄일 때마다 이처럼 여러 계산과 조율을 하게 될까. 한편으로 내가 미안한 마음 때문에 연구에 쓸 시간을 줄이는 것이 오히려 여성에게 익숙하게 요구되어온 규범을 따르는 것은 아닐까. 페미니즘을 공부해온 시간은 나를 이런 의심에서도 자유롭지 못하게 한다. 그렇다고 해서 남편과 아이에게 느끼는 미안함이 사라지는 것은 또한 아닌 것 같다.
물론 내가 읽은 자료 속 삼십여 년 전 여성들의 감정과 지금 나의 감정을 같은 것으로 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 사이 여성의 삶을 둘러싼 제도와 규범은 크게 달라졌고, 결혼과 출산 역시 더 이상 여성에게 유일하거나 당연한 삶의 경로가 아니다. 나 역시 여러 가능성 가운데 결혼하고 아이를 낳는 삶을 선택했고, 지금의 나의 삶 역시 그동안 이루어진 변화 속에서 가능해진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이제는 삼십여 년 전 여성들이 말했던 죄책감과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이 어디에서 만나고 또 어디에서 달라지는지가 더 궁금해진다. 적어도 지금의 나에게 죄책감은 가족에 대한 애착과 책임, 연구자로서 살아가고 싶은 마음, 그리고 내가 살아가는 방식을 젠더의 관점에서 되돌아보게 하는 질문들이 서로 만나는 자리에서 생겨나는 복잡한 감정에 가까운 것 같다. 이번 또문 소식지에 글을 써달라는 청탁이 조금 반가웠던 것도, 어쩌면 이러한 경험을 한번 자세히 들여다보고 말해볼 계기가 필요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또 하나의 문화는 그 출발에서부터 여성들이 자신의 체험에서 비롯된 인식을 글로 옮기고, 그것을 다른 여성들과 나눌 수 있었던 곳이기도 했다. 여성주의적 전망을 제시하는 것만큼이나 아직 제대로 이름 붙이기 어려운 삶의 경험과 감정을 풀어낼 수 있는 장을 마련하는 일 역시 또문의 중요한 실천이었다. 자신의 체험을 글로 옮기는 일은 여전히 내게 부끄럽고 때로는 외설적인 일처럼 느껴진다. 또문에서 여성들이 자신의 경험을 말과 글로 풀어내는 모습을 보아오지 않았다면, 나 역시 이런 이야기를 써볼 생각을 쉽게 하지는 못했을 것 같다. 그런 점에서 이 글 역시 어떤 해답을 제시하기보다는 지금 내가 살아가는 삶에서 생겨난 혼란을 우선 말로 옮겨보려는 시도에 가깝다. 그것이 다른 여성들의 삶과 어디에서 만나고 또 어디에서 어긋나는지는, 어쩌면 이렇게 각자의 경험이 말해진 뒤에야 비로소 알게 되는 것이 아닐까 한다. (2026. 09, 또문브런치에서 읽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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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란의 오디세이 : 권능과 역량을 잃은 여성인물들
반하라(또 하나의 문화 동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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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메로스의 오디세이는 신과 인간, 이승과 저승의 세계를 넘나드는 주인공의 귀환 모험을 따라서 아름다운 여신들의 권능과 욕망, 여성들의 지혜와 역량, 불운과 고통을 풍부한 아이러니로 전하는 기원전 7세기 또는 8세기의 서사시다. 오디세이는 주인공 오디세우스가 집을 떠나 천신만고 끝에 돌아와 아내를 넘보는 악한들을 죽이고 복위에 성공하는 가부장의 노래인데 거기엔 매력적인 여성 인물들의 권능과 다양한 역량이 반영된다. 오디세우스는 곡절진 복잡한(polytropos)한 남자다. ‘트로이 목마’ 간계를 내서 난공불락의 트로이를 함락시킨 영웅이 되지만 귀환길에 운명이 꼬인다. 씨클롭스들의 섬에서 외눈박이 거인 씨클롭스 폴리페모스(포세이돈 신의 아들)를 장님으로 만들고 약까지 올리고 도망갔다가 포세이돈의 저주를 받아 10년이 되도록 집에 못간다.
지혜와 전쟁의 여신 아테나는 자신을 닮아 변장에 능하고 계략이 출중한 오디세우스가 불운을 벗어날 수 있도록 돕는다. 오디세우스가 칼립소 여신에게 7년을 잡혀있자 아테나는 아버지 제우스를 움직여 칼립소가 오디세우스를 풀어주도록 한다. 칼립소의 섬을 떠난 오디세우스는 포세이돈의 풍랑을 맞아 의식을 잃고 헤매다 파이아케스 사람들이 살고 있는 스케리아 섬에 떠밀려간다. 표류해온 오디세우스를 발견한 나우시카 공주는 오디세우스가 구해질 수 있는 운명의 결정권이 아레테 왕비에게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맘에 든 오디세우스에게 궁에 들어가 왕보다 먼저 어떻게 왕비를 알현해야 하는 지 조언해 준다. 조언을 잘 따른 오디세우스는 아레테 왕비의 환대를 받고 알키노오스 왕이 베푼 궁전연회에서 음유시인 데모도토스가 트로이 전쟁과 자신의 활약을 노래하자 복받쳐 눈물을 흘리다 알키노오스 왕이 슬퍼하는 이유를 묻자 이전의 낮은 태세를 전환해서 당당하게 온 세계가 그의 (목마)책략을 알고 있고 그의 명성은 하늘에 미친다며 자신이 오디세우스라고 정체를 밝힌다. 깜작 놀란 파이아케스 사람들 앞에서 그는 지난 10년 겪었던 이야기를 시작하는데 고전 서사시의 독자는 오디세우스가 여기서 시작한 이야기를 통해서 괴물과 거인들, 다른 습속의 신들과 인간들이 사는 여러 섬들에 대해서 듣게 되고 오디세우스가 하데스의 저승 세계까지 키르케 여신으로 도움으로 갔다 온 이야기도 듣게 된다.
병사들에게 마술을 걸어 돼지로 만들었던 키르케 여신과 오디세우스의 만남은 욕망과 흥정이 오가며 흥미롭다. 병사들이 돼지가 되어 돌아오지 않자 오디세우스는 용기를 내서 여신을 찾아간다. 도중에 전령의 신 헤르메스가 나타나 마술에 걸리지 않는 ‘몰리’ 초를 주고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 지 조언해 준 덕분에 그는 여신의 마술을 벗어난다. 마술이 통하지 않은 유일한 남성에게 끌린 아름다운 키르케 여신이 그와 사랑을 나누며 신뢰를 쌓자는 데, 오디세우스는 나체가 되어 용맹함과 남성성을 여신께 강탈당할 수는 없다며 더는 나쁜 장난을 치지 않겠다는 엄중한 맹세를 해달라고 한다. 여신의 동침제안에 따라야 한다는 헤르메스의 조언대로 여신의 맹세를 받고나서 침대로 간다. 여신이 돼지가 된 병사들을 사람으로 돌려주게 만든 오디세우스는 만족한 병사들과 모두 행복한 1년을 지내다 보채는 병사들 때문에 여신에게 이제 집에 가야겠다고 한다. 여신은 그가 집에 갈 수 있는 방법은 예언자 테이레시아스만이 알려줄 수 있다면서 오디세우스가 하데스의 저승에 있는 테이레시아스를 만나볼 수 있도록 모든 도움을 준다. 오디세우스는 아름다운 키르케 여신이 자신을 이렇게 사랑했고 칼립소 여신은 신처럼 늙지도 죽지도 않게 해주겠다며 자신과 영원히 살자 했지만,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파이아케스 사람들에게 ‘저를 사랑한 여신들에게 저는 마음을 주지 않았습니다’라며 자신은 불사의 신인 여신과 인간 남성의 위계적 권능의 불평등한 성관계에 굴복하지 않는 자존감이 강한 남성임을 자부한다.
오디세우스는 알키노오스 왕의 궁전에서 파이아케스 사람들에게 자신이 겪었던 이야기를 다 들려주고 항해에 능한 그들의 배를 타고 드디어 이타카에 귀환한다. 오디세우스를 고향에 데려다줬다고 격노한 포세이돈은 스케리아 섬으로 돌아가는 파이아케스 배를 돌로 만들어버리고 그들의 섬을 높은 산으로 둘러버리겠다고 저주를 내린다. 오디세우스로 엮인 트로이가 초토화되고 씨클롭스는 장님이 되고 수많은 여성들의 운명이 사나워진다. 전쟁영웅 가부장의 귀향과 성공적인 복위서사는 전율케 하는 아이러니를 드러낸다.
한국에서 크리스토퍼 놀란의 오디세이가 압도적인 호평을 받으면서 천만관객을 돌파하고 폭발적인 각광을 받고 있다. 하지만 유의미한 비판적 목소리는 눌려 있는지 잘 들리지 않는다. 호메로스의 오디세이를 먼저 꺼낸 이유는 놀란의 영화가 고전에 얼마나 충실했는지를 따지며 재해석할 수 있는 자유를 문제삼자는 것이 아니라 놀란의 오디세이가 여성인물들의 주체적 역량과 복합적 매력을 일관되게 축소하고 어떻게 제거했는지 따져보는데 참조하기 위해서다. 놀란은 영화에서 오디세우스가 표류해 간 스케리아 섬의 에피소드를 모두 제거해 버렸다. 관객들은 아레테 왕비도 나우시카 공주도 트로이 전쟁을 노래하는 음유시인 데모도토스도 그의 노래로 인해서 극적으로 정체를 고백하고 자신의 사연을 들려주는 오디세우스도 볼 수 없다. 그리고 여신들이 실종되었다. 오디세우스를 떨게하며 성관계를 맺는 아름다운 여신 키르케 대신에 오디세우스의 단 몇 마디에 쉽게 무력화되는 중년의 마녀 키르케가 나온다.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에서는 황홀하게 아름다운 섬에서 살고 있는 미모의 여신 칼립소가 오디세우스의 성을 탐닉하며 7년을 붙잡고 있다. 그 여신은 사라지고 무인도와 같은 고도에 살면서 표류해온 오디세우스가 전쟁 트라우마와 죄책감에 시달리지 않게 전쟁의 기억을 잊게 하는 로터스 약물치료를 하다가 7년만에 약물투여를 끊으며 오디세우스가 기억을 찾아 집에 가도록 조력하며 오디세우스를 시중드는 어부 아낙 칼립소가 나온다. 고전의 칼립소는 오디세우스를 놓아주라는 제우스의 전령을 갖고 온 헤르메스에게 남신들은 인간 여성들을 원하는 대로 즐기면서 새벽의 여신 에오스가 인간 오리온과 뜨겁게 사랑하고, 대지의 여신 데메테르가 인간 이아시온과 열렬히 사랑을 나눈 것을 견딜 수 없어하며 오리온과 이아시온을 죽게 만들더니 나에게서 오디세우스도 뺏어가냐며 폭발한다. 신의 개입이 없는 인간 주체의 오디세이로 각색했다는 명분으로 놀란은 아름다운 키르케 여신과 칼립소 여신의 권능, 미모와 관대함과 욕망을 모두 제거시키고 잠재적 남성폭행의 피해자(키르케)나 남성의 피동적인 조력자(칼립소)로 캐릭터를 변형시키고 반면에 최강의 남성신 제우스만은 신조어 ‘제우스 법’을 만들어 반복적으로 강조하면서 유일신과 같은 존재로 부각시킨다. 놀란의 인간주체의 세계는 여성캐릭터의 권능과 활력이 제거된 강력한 우위적 남성주체의 세계다.
놀란은 페넬로페와 헬레나(제우스와 스파르타 왕비 레다의 딸)와 같은 여성인물들의 생존적 역량도 축소하고 입체적 내면을 도외시하고 단순화한다. 호메로스의 페넬로페는 뜰에서 모이를 주고 키우던 거위들이 갑자기 날아든 독수리에 목을 물려 죽는 꿈 (구혼자들은 거위들로, 오디세우스는 독수리로 은유되는) 속에서 죽은 거위들에 슬피 우는 복잡한 내면을 드러내기도 하고 구혼자들을 향해 명예로운 구혼자들은 재산을 축내지 않고 선물을 바친다고 하면서 구혼자들이 시종들을 시켜서 경쟁적으로 갖고 온 보화들을 선물로 챙긴다. 남편이라고 자처하는 오디세우스를 믿지 않고 전략적으로 테스트하는 냉철하고 주도적인 여성이지만 놀란의 페넬로페는 입체적이지 않다. 호메로스의 헬레네는 오디세우스의 영민함에 비견되는 어느 정도 신성의 능력이 있는 여성이다. 오디세우스가 거지 행색으로 변장해서 트로이 성내에 스파이로 잠입했을 때 헬레네는 오디세우스를 간파해서 변장을 걷어내고 그에게서 그리스 군의 전략을 알아내고 살려서 보내준다. 반대로 트로이 목마가 들어왔을 때 헬레네는 목마 안에 그리스 정예 장수들이 숨어있는 것을 짐작하고 그들의 아내 목소리를 흉내내서 남편 이름을 부르며 절체절명적 함정으로 도발한다. 오디세우스가 그리움을 참지 못하고 답하려는 장수의 입을 온 힘으로 틀어 막아 발각되지 않지만 자칫 발각되었으면 헬레네의 ‘장난’이 전쟁의 승패를 바꿨을 것이다. 훗날 오디세우스의 아들 텔레마코스가 아버지 소식을 들으러 스파르타에 갔을 때 헬레네는 그가 오디세우스 아들인 것을 직관적으로 알아보고 반갑게 맞아 아버지 이야기를 들려준다. 스파르타의 왕 메넬라오스는 헬레네와 결혼해서 왕권을 얻었기 때문에 헬레네가 전왕의 딸일 뿐 아니라 친부가 제우스인 헬레네는 스파르타 궁에서 메넬라오스보다 주도적이고 여전히 아름답다. 놀란의 헬레네는 트로이 전쟁이 자신 때문이 아니라 아가멤논 때문에 일어났다고 자신을 방어하지만 말을 잘 하지 못하고 얼굴과 몸에 폭행의 흉터가 깊게 새겨진 폭행의 피해자로 나오고 미모가 예전과 다르다고 메넬라오스의 모욕까지 들어야 한다.
2017년 여성으로는 처음 오디세이를 서사시로 영역한 고전학자 에밀리 윌슨이 놀란의 영화는 여성의 주체성과 매력을 축소시켰다고 비판했는데 조금도 반박할 수 없다. 고전학자 메리 비어드는 놀란의 영화에 미묘한 섹시함이 없다고 지적했는데 놀란도 여기에 반박할 수 없을 것이다. 영화에서 오디세우스는 거의 금욕적으로 보여주고 성적인 것은 전쟁 성폭행의 폭력적인 피해로만 제한하고 여성인물들을 주로 그 폭행의 피해자로 보여준다. 놀란의 오디세우스는 자신이 발명한 ‘트로이 목마’ 전략은 제우스법을 무시한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이고 그로 인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학살당하고 강간당하고 약탈당하고 노예가 되고 유민들이 발생하고 질서가 위협받아 도시국가들의 문명이 붕괴되는데 주된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깨닫고 깊은 고통을 느끼며 속죄하는 남성이 되어있다. 놀란의 오디세우스는 신들의 도움없이 자신의 의지로 이타카에 귀환해서 다수의 악한들을 홀로 제압해서 복위하고도 지은 죄를 씻기 어렵다고 참회해서인지 서쪽바다를 향해 속죄의 유배를 떠난다. 놀란은 한편 희생적인 고상한 속죄서사를 걸어놓고 자가당착적으로 폭력을 전시하는데 주저하지 않고 하드 보일드 오락 활극을 펼친다. 필로스의 아테나 신전에서 아들이 암살당하게 된다는 정보를 듣고 신전에 달려가 오디세우스는 무협 액션으로 홀로 암살자들을 다 죽이고 신전에 불을 지르고 아들을 구해내는데, 고전에서 찾아볼 수 없는 에피소드다(호메로스가 이런 촌극을 노래했다면 오디세이가 수천년 고전으로 남지 못했을 거다). 어차피 이타카 궁에서 구혼자 대학살을 보여주는 과한 살육장면이 예고되어 있는데 바로 전에 필로스 아테나 신전의 학살극을 넣다니 폭력물에 중독된 관객들이 아니라면 역할 수 밖에 없다.
아테나 여신은 투구를 쓰고 갑옷을 입고 제우스의 머리에서 태어나서 무적의 방패를 든 강력한 여신이고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에서는 변화무쌍한 모습으로 나타나 막강한 권능을 발휘하는 오디세우스의 수호신이다. 아테나 여신은 오디세우스에게 살해당한 구혼자들의 가족들이 복수를 다짐하고 무장하고 와서 오디세우스가의 삼대 남성들과 몇몇 충복들에 맞서 살상을 벌일 때에 나타나 이타카 사람들에게 평화를 명령하고 제우스 신에게 번개를 치게 해서 상잔을 끝내게 하며 오디세이 서사의 시작과 끝을 맺는 총괄주역으로 나온다. 놀란 영화의 아테나 여신은 신의 권능은 당연히 없고 이름만 아테네 여신이지 영리한 감독의 모호한 장치적 형상으로 나온다. 아테나 여신 역을 하는 젠데이아를 트로이의 아테나 신전에서 병사들에게 참수당하는 만행의 피해자로 만들어 아테나 여신이 참수만행의 피해자가 된 것처럼 만든다. 뒤짚어서 신전에서 참수당한 여사제가 아테나 여신의 형상으로 나타나 그를 죄책감에 시달리게 하는 양심의 환영일 수도 있다는 듯이 아테나 여신을 ‘모호성’으로 뭐든 될 수 있다는 식으로 던져놓고 호메로스의 총괄 여신 아테나의 독보적 위상을 비워낸다. 젠데이어가 여사제를 연기하든 환영이든 아테나 여신을 연기하든 여성인물을 참수만행의 피해자로 만들고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고 키르케도 병사들의 잠재적 성폭행 피해자로 암시하고 헬레네는 폭생의 흉터가 온 몸에 새겨진 흉폭한 폭행의 피해자로, 놀란은 일관되게 여성인물들을 만행 폭행의 피해자로 가두고 있다.
에밀리 윌슨은 놀란이 자신의 번역을 바탕으로 영화를 만들었다는데 처참하게abysmal 각색해서 영화를 만들었다고 불쾌감을 감추지 않았다. 여성 고전학자들과 저널리스트들의 비판적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수 없는데 한국의 오디세이 번역자이자 대표적인 고전학자 김헌은 영화에 비판적인 고전학자들의 평이 들리지 않게 ‘녹인 밀랍으로’ 귀를 막은 듯 비평시각에 대해서는 어떤 언급도 없이 놀란의 오디세이 재해석은 고전 이상으로 감동적이고 그에게 저항할 수 없는 세이렌의 노래 자체였다며 곧 두번째 극장표를 예약했다고 극찬했다. 한국에서 천만관객을 돌파하며 남녀를 불문하고 놀란의 영화가 각광받을 수 있는 이유는 한국사회에서 여성들을 ‘피해자’ 아니면 남성의 조력자 이상으로 인식하는 다양한 여성역량의 스펙트럼이 사회문화적으로 장착되지 않아서 영리한 놀란의 영화에 아무런 문제를 느낄 수 없이 열광할 수 있다는 것인지 의문이다.
19세기 말 영국의 고전학자 새뮤엘 버틀러가 오디세이를 쓴 시인은 시칠리아의 미혼 여성이고 남성일 수 없다고 주장할 만치 오디세이가 ‘여성적’ 서사시라 했는데 놀란의 영화를 보고 나서야 19세기 새뮤엘 버틀러의 주장이 환기되고 갑자기 호메로스가 준 페미니스트가 되어버리고 대표적 가부장 서사시인 오디세이가 ‘여성적’ 오디세이가 되어버리는 아이러니를 마주한다. 적어도 다양한 여성 캐릭터들이 존재하면서 주는 안도만으로 말이다.
놀란은 하데스의 저승 세계에서 오디세우스가 만나는 여성들을 영화에서 100퍼센트 삭제해 버렸다. 예언자 테이레시아스를 만나러 저승에 갔을 때 오디세우스는 어머니와 하데스에 납치되어 저승에 살고 있는 페르세포네 여신이 데리고 나온 10여명의 여성들을 만난다. 여성들 중에는 포세이돈에게 강간당해 아이들을 낳은 티로를 비롯해서 제우스의 아이들을 낳게 된 여성들도 포함되어 있다. 그 여성들을 다 만난 이후에 오디세우스는 남성들을 만나기 시작하는데 그들은 몇 명에 지나지 않는다. 죽은 인간들은 역량을 다 잃게 되는데 죽었어도 테이레시아스의 예언능력이 있는 것은 것은 페르세포네 여신이 특별히 그의 능력을 남겨주었기 때문이다. 호르메스의 오디세이에서는 저승에서 여성존재들을 우선적으로 기억하고 페르세포네 여신의 권능을 인지시킨다.
놀란의 영화에서 다문화적 배경의 배우들이 나오는 것을 두고 다양성 실천의 본보기로 칭찬이 있는데 검토가 필요하다. 남편 아가멤논을 살해한 클리타임네스트라와 헬레네를 한 명의 흑인배우 루피타 뇽오가 맡았는데 물론 자신의 딸, 이피게니아를 죽인 남편 아가멤논을 복수한 것이라고는 보여주지만 두 캐릭터는 공통적으로 한 3천년 가깝게 부정적으로 고정되어 회자되어 왔다. 특히 헬레네의 경우, 아름다움을 지우고 폭행의 흉터들을 흑인배우 뇽오의 얼굴과 몸에 가득 새겨넣은 연출의 의도는 모호한 냉소성을 남겨놓는다. 권능이 거세된 아테나 여신이 오디세우스의 환영으로 아테나 신전의 참수 피해자로 흑인배우 젠다이아가 모두 맡은 것은 피부색의 이슈가 안되고 놀란의 여성 캐릭터들이 모두 부정적으로 재현된 젠더문제에 있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피부색 개연성을 완전히 부정하기 힘들다. 구혼자 폴리보스는 고전에 안나오는 잔인함을 연기한다. 노견 아르고스를 발로 차고 구걸하는 그릇에 침을 뱉어 굴욕을 준다 그 역을 흑인배우가 했다. 유일하게 무난한 흑인배우 역은 힙합가수 트레비스 스콧이 맡은 음유시인 페미오스인데 (그는 스케리아 섬의 궁전에서 트로이 전쟁을 노래해서 오디세우스를 울리는 명성이 높은 음유시인 데모도토스가 아니다.) 그를 구혼자들과 함께 죽이지 않고 살려주면서 문명이 망하고 문자가 사라지게 되는데 우리의 이야기를 노래로 전하라고 살려준다.
고대 그리스의 낯선 자들에 대한 환대 규범인 크세니아(xenia)가 실용적 차원의 조건적 의무였다면 놀란이 만든 ‘제우스 법’은 십계명과 같이 내면화해서 따라야 하고 어기게 되면 고통스럽게 회개해서 죄값을 치러야 하는 속죄의 희생양을 부를 듯이 무겁다. 호메로스의 오디세우스는 노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을 만날 때까지 내륙으로 걸어가 그런 사람을 만나게 되면 노를 땅에 꽂고 포세이돈 신에 제사를 봉헌하면 저주가 풀린다고 한다. 이후 오디세우스는 이타카로 돌아와 무탈하게 살다가 잘 죽을 수 있다고 희망을 주지만 서쪽 바다를 향해 유배 항해를 떠나는 오디세우스를 만든 놀란의 오디세이는 속죄의 죽음을 향한다. 여성인물들을 일관되게 그들의 역량을 제거시키고 폭행의 피해자로만 보여주거나 남성의 조력자로 축소시키고, 다양성 실천의 긍정적 연출이라 인지되면서 흑인배우들에게 돌아가는 부정적 역들의 인상이 모호한 인종주의적 편견을 안정화시키는 것은 아닌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지 않고, 우위적 백인남성의 ‘고상한 희생서사’를 완성시킨 놀란의 오디세이가 뜨겁게 한 목소리로 각광받는 이 시대, 이 세계에 깊은 우려가 자리잡는다. (2026. 09, 또문브런치에서 읽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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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란의 오디세이 : 반하라 동인의 글에 이어쓰기 남성영웅 참회를 ‘만들어낸’ ⟪오디세이⟫를 긍정적으로 보고 싶은 페미니스트의 변명
김은실 (또 하나의 문화 동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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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놀란의 ⟪오디세이⟫가 일관되게 여성 인물들의 역량을 제거하고 피해자, 조력자로 재현하면서 젠더적 인종적 편견에 기대고 있다고 강하게 비판하는 반하라님의 비평에 동의한다. 반하라님은 한국에서 천만이 넘는 관객들이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에게 환호하고 있고, 그런데도 비판적인 페미니스트 비평이 나오고 있지 않다고 ⟨또문소식⟩ 글에서 강하게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나는 놀란 감독의 ⟪오디세이⟫를 새롭다고 보고 싶었다. 그래서 반하라님의 ⟨또문소식⟩ 글을 먼저 보고, 나의 관람에 대한 글을 쓰고 싶었다. 이 글은 반하라님의 글에 대한 일종의 변명 같은 이어쓰기이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오디세이⟫를 보면서 내게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호메로스의 서사시가 아니었다. 오래전 서울에서 보았던 트로이 여성들에 관한 연극의 이미지였다. 그리고 전쟁 가해자의 귀향은 참회의 여행 길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트로이 전쟁 영웅이 참회한다는 것만으로도 이 영화를 좋게 보고 싶었다. 그리고 그것이 페미니스트 비판이 함께 만들어낸 평화 세계관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기억을 확인해보니 그 연극은 1997년 9월 서울에서 열린 세계연극제에 초청된 ⟪트로이의 여인들(The Trojan Women)⟫이었다. 뉴욕의 La MaMa 극단과 한국의 드라마센터가 함께 공연한 작품(Andrei Șerban 연출)으로 드라마센터에서 친구와 함께 봤다.
공연의 세부적인 내용은 이제 거의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까지 내게 남아 있는 강력한 이미지가 하나 있다. 무대 위에서 펄럭이는 것 같았던 여성들의 나신이다. 무대 위쪽, 2층 난간 같은 곳에 여자들이 묶여 있었고, 거의 나체처럼 보이게 하는 의상을 입은 여성들의 몸이 나뭇가지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강간을 당하고 버려진 여성들의 이미지를 표현하고 있었던 것인데,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그 이미지가 남아 있다.
그 공연을 통해 나는 트로이의 패배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처음으로 신체적(몸적)으로 이해했던 것 같다. 전쟁에서 진다는 것만으로 한 나라가 역사에서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트로이의 남자들은 죽임을 당하고, 살아남은 여자들은 승리한 그리스 남자들의 노예와 성적 전리품이 되었다. 여성들은 강간당하고 승자인 그리스인의 아이들을 낳는다. 그렇게 다음 세대가 더 이상 트로이인이 아니게 될 때 트로이는 비로소 사라진다.
그때 나는 전쟁에서 여성에 대한 성폭력이 전쟁에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결과가 아니라 패배한 공동체의 재생산 능력과 미래를 파괴하는 행위일 수 있다는 것을 강렬하게 느꼈다. 상대를 전멸시키는 전쟁에서 여성에 대한 성폭력은 전쟁의 외부에 있는 우발적인 사건이 아니라, 전쟁을 구성하는 폭력의 내부에 있다는 인식이었다.
내게는 이것과 연결되는 또 하나의 오래된 기억이 있다.
1991년 김학순 님은 자신이 일본군 ‘위안부’였음을 공개 증언했다. 그때까지 한국 사회에서 유통되던 이야기 가운데는 위안부로 끌려갔던 여성들은 돌아오지 못했으며, 돌아오더라도 자신이 겪은 일에 대한 수치심 때문에, 심지어 부산 앞바다까지 와서도 바다에 몸을 던져 죽었다는 식의 이야기들이었다. 1993년 내가 「민족담론과 여성」의 초고를 쓰고 있을 때, 나는 그런 이야기들의 담론적 효과에 주목했다.
왜 여성은 돌아오지 못해야 하는가?
왜 살아 돌아온 여성은 자신이 누구였는지를 말할 수 없어야 하는가?
왜 전쟁에서 성폭력이나 성착취를 당한 사람에게 그 폭력의 수치가 귀속되어야 하는가?
나는 이것을 가부장적 민족주의와 성적 도덕주의가 만들어내는 담론적 권력이라고 비판했다. 피해 여성에게 수치심을 부과함으로써 살아 돌아온 여성조차 자신의 경험을 말할 수 없게 만드는 권력이었다.
⟪오디세이⟫를 보고 극장을 나서면서 나는 오래전의 이 두 기억을 다시 떠올렸다. 그리고 이런 질문을 하게 되었다. 전쟁이 끝난 뒤 누가 돌아올 수 있는가? 그리고 돌아온 사람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트로이의 여성들은 승자의 노예가 되어 끌려간다. 식민지와 전쟁을 경험한 조선 여성들은 고향으로 돌아오더라도 자신이 겪은 일을 말할 수 없었다. 피해 여성에게 귀환은 너무나 오랫동안 불가능하거나 불완전한 것이었다.
그런데 ⟪오디세이⟫는 정반대편에서 귀환을 이야기한다. 돌아오는 사람은 피해 여성이 아니라 전쟁의 승리자 오디세우스다. 그는 트로이를 함락시킨 영웅이고, 이제 온갖 고난을 헤치고 가족과 고향으로 돌아가려 한다. 서구 문학은 수천 년 동안 그의 귀환을 인간의 위대한 모험으로 이야기해왔다. 그러나 21세기에 우리는 이 영웅을 과거와 똑같은 방식으로 집으로 돌려보낼 수 있을까?
많은 페미니스트들이 놀란의 ⟪오디세이⟫를 비판했다. 그 비판에 상당 부분 동의하면서도 나는 이 영화를 조금 다르게 보고 싶었다. 트로이를 파괴한 남자는 아무런 참회 없이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가? 그럴 수 없다고 생각하고, 그런 의미에서 놀란 감독의 의도에 동참하고 싶었다.
Emily Wilson을 비롯한 페미니스트 고전학자와 비평가들이 놀란의 영화에서 여성과 여신들의 역할이 축소되었거나 제거되었다고 비판하는 데 당연히 동의한다. 반하라 님이 단순히 재현의 문제가 아니라 여성의 욕망과 권능을 제거했다는 비판에도 당연히 동의한다. 특히 전쟁에서 여성들이 겪은 폭력이 다시 남성 영웅의 죄책감과 도덕적 성장의 근거와 자원으로 사용된다면 그것은 당연히 문제적이다. (이러한 부분은 권은선 님이 다룬 ⟪귀향⟫ 분석에서도 다루어지고 있다.)
나는 오디세우스의 참회를 희생 서사로 보는데서 끝내고 싶지 않았다. 더구나 제한된 시간 안에 거대한 고전을 다시 구성해야 하는 영화라는 매체의 조건을 생각한다면, 무엇을 축소했는가와 함께 놀란 감독이 무엇을 선택하여 전면에 내세우고 있는가에 대해 물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페미니즘은 오랫동안 전쟁에서 여성들이 당하는 강간, 성노예화, 살해, 추방을 말해왔다. 그것은 역사에서 지워졌던 여성들의 경험을 가시화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런데 그 오랜 비판에도 불구하고 그 비판이 일방향적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한국사회만이 아니라 많은 사회에서 성폭력을 당한 여성들에게 계속해서 진실을 밝힌다는 이유로 그 경험을 말하도록 요구해왔다. 그러나 전쟁을 수행한 남성 영웅들에게는 자신들이 여성들에게 무엇을 했는지를 말하도록 충분히 요구하지 않았고, 그들은 자신들이 행한 것을 말하지 않는다. 피해자의 증언 사례들은 쌓이고 있지만, 가해자의 참회는 축적되지 않았다. 바로 이 지점에서 나는 놀란의 ⟪오디세이⟫가 21세기에 갖는 의미가 중요하다고 보았다.
오늘날 우리는 세계 곳곳의 전쟁에서 죽은 여성과 아이들, 성폭력을 당한 여성, 폐허가 된 도시와 난민의 이미지를 일상적으로 접한다. 그 이미지들은 반드시 기록되고 보여져야 한다. 그러나 피해의 이미지가 끊임없이 반복된다고 해서 우리의 윤리적 감응이 반드시 더 깊어지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오히려 피해 여성의 이미지는 너무나 익숙한 전쟁의 이미지로 소비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제 질문의 방식도 좀 달라져야 할 것 같다.
전쟁을 수행한 사람은 어떻게 돌아와야 하는가?
오디세우스의 귀환을 단순히 영웅의 귀향으로 읽지 않고, 나도 자신이 가담했던 폭력과 대면해야 하는 가해자의 귀환으로 읽고 싶었다. 전쟁이 끝났다고 해서, 살아남았다고 해서, 집에 도착했다고 해서 귀환이 끝난 것인가?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를 기억하지 않는 전쟁 영웅의 귀환은 아직 완성되지 않은 것이 아닐까? 여기서 나는 오래전 ⟪트로이의 여인들⟫에서 보았던 그 흔들리던 여성들의 몸을 다시 생각한다. 그 여자들은 오디세우스가 떠나온 트로이에 남겨진 사람들이었다. 그동안 우리는 그 여성들을 바라보며 전쟁의 잔혹함을 이야기해왔다. 그리고 그것은 반드시 계속되어야 한다.
그러나 트로이에서 배를 타고 떠나는 남자들에게, 그들이 무엇을 보았는지? 그들이 무엇을 했는지? 그들은 그것을 어떻게 기억하는지? 그리고 그 기억을 가지고 어떻게 가족에게 돌아가는지? 이 질문을 던지는 순간 오디세우스의 긴 항해는 더 이상 괴물과 신들을 이겨내는 영웅의 모험만이 아니다. 그것은 전쟁을 수행한 사람이 자신이 가담했던 폭력과 대면하면서 다시 인간이 되기 위해 통과해야 하는 윤리적 여행이 된다. 나는 이것이 놀란 감독이 ⟪오디세이⟫를 21세기의 관객에게 가져오면서 던지고 싶었던 질문 가운데 하나가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나는 이 영화를 오디세우스의 참회의 영화로 보고 싶었다. 어쩌면 나는 놀란 감독의 의도를 너무 충실하게 따라가고 있는 관객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에게는 그렇게 보고 싶은 이유가 있다. 나 역시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서 전쟁 책임자들의 참회와 일본 정부의 책임 인정과 사과를 오랫동안 바래온 사람이다. 그래서 놀란의 기획에서 내가 읽어낸 것이 실제로 21세기의 현실에서도 가능했으면 좋겠다, 그래서 일본에서도 참회의 윤리적 여행을 하는 영화가 나왔으면 좋겠다고 극장을 나서면서 옆에 있는 친구에게 말했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21세기의 ⟪오디세이⟫가 오래된 전쟁의 문법을 뒤집는 영화이기를 바랐다. 피해 여성에게 수치와 침묵을 부과하면서 승리한 남성에게는 영광과 귀환을 허용했던 문법. 그것을 뒤집어 피해자가 수치심을 짊어지는 것이 아니라 가해자가 책임을 짊어지게 하는 것. 여성이 자신이 누구였는지를 숨겨야 하는 것이 아니라, 전쟁영웅이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를 말하게 하는 것. 나는 오디세우스의 귀환에서 그런 가능성을 읽고 싶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가해자의 참회가 피해자의 목소리를 대신할 수는 없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Emily Wilson을 비롯한 반하라 등의 페미니스트 비판은 여전히 중요하다. 피해 여성의 경험을 가해자의 죄책감과 도덕적 성장의 이야기로 바꾸어버린다면 또 다른 방식으로 피해자의 목소리는 사라지는 수가 있게 된다. 그러나 그 비판과 동시에 이제 전쟁을 수행한 남성들에게도 강하게 질문을 던지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당신은 무엇을 했는가? 무엇을 기억하는가? 그 기억에 대한 책임을 짊어지지 않은 채 정말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가? 어쩌면 내가 놀란의 ⟪오디세이⟫에서 본 것은 영화가 실제로 성취한 것보다, 내가 오랫동안 보고 싶었던 것을 본 것인지도 모르겠다. (2026. 09, 또문브런치에서 읽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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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인 동정] 안이희옥, 김찬호 두 분의 새 책 소식. 축하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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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이희옥 동인의 중단편소설집 ⟪흐뭇한 인생⟫이 출간되었습니다.
개인적인 기억 속에서 한국근현대사의 굴곡과 상처를 보듬는 묵직한 글이면서도, "이 글은 흐뭇한 마음의 평화에 도달하게 된 어떤 노년의 모습이다. 어쨌든 묵은 원고들이 너무 쌓였으므로 완벽주의를 포기하고 출판한다. 건강도 불투명해서 이 소설이 마지막이 될지,계획대로 앞으로 한 장편 더 쓸 수 있을지 알 수 없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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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찬호 동인의 새 책 ⟪무수면사회⟫는 40대 초부터 세 차례 지독한 불면을 겪은 자신의 경험에서 출발해, 왜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지고 기술이 발전했는데도 우리의 밤은 더욱 짧고 불안해졌는지를 묻고 있습니다.
압축 성장 과정 속 장시간 노동과 통근, 입시 경쟁, 24시간 물류와 심야배송, 돌봄과 출산, 전쟁과 재난까지 추적하며 개인의 불면 뒤에 놓인 사회적 조건을 살펴본다. 저자는 수면을 생리적 작용인 동시에 사회적 현상으로 바라보며, ‘잠을 빼앗고 다시 잠을 상품으로 파는’ 현대사회의 역설도 짚고 있습니다. 여러 유튜브 채널을 통해서 북토크를 하고 계셔서 저자와 함께 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재밌는 유튜브도 많이 찾으실 수 있을 거예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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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또문소식에서 소개드렸던 919 기후정의행진에 참가하시는지요?
오픈카톡방에서 조한혜정 선생님이 기후정의행진에서 만나자고 먼저 인사를 전하셨는데요, 행진 중에 동인들을 만나는 즐거움을 갖는 동인들이 많으시길 바랍니다. 행진의 본 행사는 오후 3시 서울시청-숭례문에서 진행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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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행진의 슬로건이 "지구를 불태우는 폭주를 멈춰라!"라고 되어 있고, '3대 메가 프로젝트'가 명시되어 있는데요, 트럼프나 시진핑, 그리고 이재명까지 AI Race에 동참하고 있는 가속주의자 정치지도자들의 '폭주'는 정말 염려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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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문화를 후원하고 계신 동인들
후원회원(가나다순): 곽영선, 권김현영, 김경희, 김미현, 김보화, 김상애, 김성례, 김소영, 김신현경, 김영경, 김영옥, 김영일, 김유익, 김은실, 김정명신, 김정은, 김정희원, 김주희, 김진아, 김찬호, 김태형, 김현미, 김혜련, 김효정, 김희옥, 남정호, 두애린, 문수복, 문정주, 박나미, 박은, 박진숙, 박총, 배채은, 백경흔, 변재란, 소영, 손은정, 안혜경, 안희경, 안희옥, 양선미, 양현경, 양현아, 여은영, 연주희, 우은희, 유승희, 이경자, 이선향, 이소희, 이수정, 이숙경, 이은아, 이은주, 이정주, 이지예, 이진아, 이헌미, 이현주, 이혜령, 장필화, 전유나, 정진경, 정혜란, 정혜진, 정희진, 조민아, 조옥라, 조은, 조형, 조한혜정, 지현, 진영옥, 채혜원, 최소연, 최수연, 최은숙, 최은주, 최한솔, 한혜정, 허순희, 현유라, 황은진, 황정하(85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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