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느새 또 한 해가 저물고 있습니다.
작년 이 맘 때만 하더라도 계엄정국으로 혼란스러운 시간을 보냈었습니다만, 지금은 어느 정도 그 혼란이 정리가 된 걸까요? 1999년에 시작되었던 레모니 스니켓의 위험한 대결(Unfortunate Events) 시리즈는 짐 캐리를 주인공으로 영화화되기도 하고, 소설만으로 13권까지 성공적인 출판을 했던 책인데, 늘 '해리 포터'와 비교되면서, 부모들이 사주는 책 1위 해리 포터와 달리, 부모 몰래 사 읽는 책 1위로 꼽히는 책이었어요. 누군가 이 책을 요약하기를 '하나의 고생이 끝나면 더 큰 고생이 뒤따라온다'라고 했는데(아... 청소년들은 왜 그 책에 그리도 열광했던 걸까요?), 올 해 주목받은 몇 편의 영화들이 있지만, 아래 소개 해드릴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도 '하나의 전투가 끝나면 또 다른 전투가 이어진다'로 번역할 수 있을 것 같고, 요즈음의 상황 또한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 한 해 또문에서는 차근차근 부팅하는 시간을 가진 것 같습니다. 작년부터 이어진 페미니스트 '전환'담론을 일단락 지으면서, '돌봄'담론으로 좀 더 주제를 명료하게 할 수 있었고, 월례포럼외에도 독서회, 선흘포럼 등을 통해 페미니스트들의 돌봄 토론을 더 예리하고 풍성하게 가져올 수 있었습니다.
여름의 열기를 느끼며 진행했던 연속강의 <'위안부' 더 많은 논쟁을 할 책임> 또한 흥미진진하게 진행되었었는데, 이 연속강의는 여름을 놓치셨던 여러분들의 요청으로 새해 1월에도 재개될 예정입니다. 곧 자세한 안내를 드릴 터이니 이번에는 놓치지 마시고 함께 해주기를 당부드려요. 새해에도 '위안부' '논쟁'을 계속하게 될 예정이지만, 그 외에도 제주4.3사건까지 페미니스트 역사해석의 시도가 이어질 예정입니다. 끝없는 고생, 끝없는 전투, 과거의 사건들이 그 끝의 실마리를 우리에게 주어줄까요? 🌈🌈🌈
* 이번 또문소식은 읽을 내용이 많습니다. 시간 나실 때 찬찬히 읽어봐 주세요. |
|
|
2025년 마지막 월례포럼 정혜진, 여성해방시의 콜렉티브 형식: 고정희와 또 하나의 문화 |
|
|
고정희 시의 연구자이자 또문의 운영위원이기도 한 정혜진 동인께서 올 봄에 박사학위를 받으셨답니다.
또문 동인지를 만들던 때 두드러졌던 '집합적 글쓰기'란 최근 모두가 저자가 되는 시대, 혹은 AI글쓰기가 시작된 시대, '저작권'과 표절, 저자윤리, 팩트체크와 같은 장애물과 걸림돌을 훌쩍 넘기며 집단지성의 힘과 '글쓰기'의 효능감을 만끽할 수 있었기에 더 주목을 받는 것 같습니다. 이번에는 고정희 '시'의 언어로서 집합적 형식을 살펴볼 수 있는 흥미로운 자리가 될 것 같습니다. 온오프병행으로 진행되니, 많이 참석해주세요.
|
|
|
또 하나의 문화 소모임, 또문독서회는 진행중 (회원모집은 언제나) |
|
|
8월부터 시작한 또문독서회가 한 해를 마무리 중입니다. 그간 우에노 지즈코의 <돌봄의 사회학>, 실비아 페데리치의 <캘리번과 마녀>, 낸시 폴브레의 <돌봄과 연대의 경제학>, 리아락슈미피엡즈나-사마라신하의 <가장 느린 정의>, 앨리스 웡의 <급진적으로 존재하기>, 조안 C 트론토의 <돌봄민주주의>를 읽었고, 이제 마지막 12월 17일 수요일, 한나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을 남겨두고 있습니다.
올해 가을의 많은 학술제, 포럼, 전시회 등에서 '돌봄'이 가장 뜨거운 주제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또문독서회만의 '시좌'가 있으리라는 점을 짐작하시리라 믿습니다. 기대했던 인원이 거의 충족되었기 때문에 새로 많은 모집을 하긴 어렵지만 그래도 살짝 문을 열어두려고 해요. 내년에도 돌봄 주제의 책읽기는 계속 이어질 것 같고요, 어떤 형식으로든 함께 읽은 내용들을 공유할 기회를 마련하려고도 생각해보고 있습니다.
또문 소모임, 작은 학습공동체로 잘 안착하기를 바라며, 함께 하실 회원/동인들을 기다려 봅니다.
|
|
|
함께 읽은 목록에 있었던 <가장 느린 정의>와 <급진적으로 존재하기>와 관련된 칼럼 세 편을 소개합니다. <급진적으로 존재하기>는 원제가 "Disability Vibility"인데, 그야말로 글쓰기와 아카이빙의 힘이 느껴지는 그런 책이었습니다. 어 예전에 이런 일들 많이 시도했었는데!라고 생각하면서 장애계의 '가시화프로젝트'에 다시 경탄했습니다.
그리고 그 즈음(11월 14일) 안타깝게도 앨리스 웡의 타계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
|
|
예술은 무언가를 느끼게 해야 한다고들 하는데, 나는 내 모습이 바로 나의 예술임을 깨닫기 시작했다. 내 몸, 내 얼굴, 내 상처들은 하나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었다 — 바로 나의 이야기. 하지만 인생이란 게 가끔은 그런 법인가 보다. 아름다움은 오직 뒤돌아보며, 시처럼, 고요 속에서야 비로소 눈에 띄는 법이니까.
앨리스 웡 |
|
|
함께 나눠요.
이번 달부터 또문 동인들이 쓰는 짧은 에세이를 3편씩 싣고자 합니다. 영화나 드라마에 대한 논평이나 후기, 가장 인상적인 혹은 같이 공유하고 싶은 여성 관련 뉴스, 아이디어 노트 등 A4 용지 반쪽에서 2쪽에 이르는 길이의 글입니다. 미리 섭외된 동인들의 글, 최근에 SNS 등에 썼던 글, 투고의 글 등으로 구성될 예정이에요. 이달에는 프랑스에 거주하는 박혜란(소란) 동인의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에 대한 이야기, 김은실 동인의 <은중과 상연>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김영옥 동인께서 채널예스에 기고하신 '말년성'에 대한 글까지 이어집니다. |
|
|
향성(tropism)을 넘어 박혜란(소란), 또 하나의 문화 동인, 프랑스 툴루즈 거주
폴 토마스 앤더슨(PTA)은 토마스 핀천의 소설, <바인랜드>의 주요 여성인물을 흑인 무장 혁명가로 바꿔 인종/젠더 관계구성을 흥미롭게 짠 영화,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를 만들었다. 트럼프 정권과 유착된 백인우월주의와 이민자 억압에 대한 비판을 희화적 오락물(백인 우월주의자 남성이 흑인여성에게 ‘역강간’을 당했다고 호소하는 식의...)로 만들어 관객에 다가가는 접근성도 확보하고 Gen Z 흑백 ‘혼혈’소녀를 희망의 주체로 전망하면서 헐리우드식 PC 문법을 따르고 있었다. 하지만 신중하게 고려해서 맞춘 그 ‘문법’에도 불구하고 주류 백인남성이 흑인여성을 대해 온 ‘향성’(굴성)이 당혹스럽게 확연했다.
1984년 보수로 전회한 미국사회를 배경으로 무장혁명에 나선 여주인공 ‘퍼피디아’ 캐릭터를 보면 그보다 한 20년 전 이후 활동했던 ‘블랙팬서’당의 여성전사들이 떠오른다. (블랙팬서당은 미국 국내안보의 최대위협으로 규정되어 FBI의 가혹한 탄압을 받았고 죽음의 두려움에 포획되어 자정능력을 상실한 남성팬서들의 성차별적 폭력과 도덕적 몰락으로 붕괴했다.) 특히 확고한 신념과 의지는 물론 지성과 관능을 무기로 블랙팬서 당의 당수(1974-1977)가 되어 탁월한 지도력을 증명했던 일레인 브라운의 급진적 활동은 PTA가 ‘퍼피디아’를 구상하는데 반드시 참고했을 것이다. (성차별적 폭력의 위협때문에 당을 떠나게 된 시점까지의 한 흑인여성 이야기, 일레인 브라운의 <A Taste of Power>는 1992년 출판되었고, 흥미롭게도 일레인이 헐리우드의 흑인 재현을 비판하는 수년 전 동영상도 유튜브에 올라와 있다.)
흑인 재현의 문제를 비판한 일레인 브라운의 목소리를 무시한 PTA는, 젊고 아름다운 흑인여성 혁명가들이 분출했던 관능적 이미지를 착취해서 퍼피디아를 만들면서 흑인여성 혁명가들의 실천이 흑인 커뮤니티에 남긴 탁월한 유산을 지워버렸다. 동지들을 배반하고 자신의 아기도 버렸던 퍼피디아, 범행의 대가를 치루도록 숨어 살아가는 급진적 행동파 흑인여성 퍼피디아는 실제의 흑인 여성혁명가들의 삶과 정반대로 부정적이다. 블랙팬서 급진 여성들은 FBI와 갱단에 의해 살해되거나 사고를 달고다니는 남성 팬서들을 대신해서 당을 맡아 재정을 확보하고 학교를 만들어 아이들을 교육시키고 함께 돌보며 무상급식, 무상의료와 교통 서비스를 커뮤니티에 제공하며 당의 지지도를 끌어올렸다.
폭력적인 성차별적 위협으로 인해 당을 떠난 일레인 브라운은 독자적으로 조직들을 만들어 81세가 되는 오늘날에도 평생 흑인여성들과 아이들, 투옥되는 청소년들을 돕는 사회활동을 해왔고 최근엔 그들을 위한 주거프로젝트를 이끌고 있다. 급진적 흑인 여성혁명가들은 과거의 실패에 머물러 숨어사는 것이 아니라 체험에서 뿌리를 내린 페미니스트가 되어 평생에 걸친 사회활동으로 커뮤니티에 유산을 쌓고 있는데, 이들의 급진적 에너지와 관능적 이미지를 착취해서 그들이 연상될 수 밖에 없도록 만든 PTA의 퍼피디아의 부정적 이미지의 전파는 일레인과 같은 급진적 흑인여성 활동가들의 존재를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주류 ‘백인남성’의 익숙한 폭력의 반복으로 여겨질 것이다. .
신소설의 창시자로 알려진 나탈리 샤로트의 향성(Tropism 1939)은 나뭇잎이 햇빛을 향하는 생물학적인 반응과 같이 다양한 상황에서 보이는 사람들의 ‘향성’을 스케치하고 있다. 미국사회에서 흑인여성을 대해온 백인남성들의 ‘향성’은 PTA의 퍼피디아 재현과 무관할 수 없다. 개인 각자의 ‘향성’을 감각하고 그 굴성을 꺽는 페미니스트의 통과의례가 PTA에게도 필요한 것이다. (2025. 11, 또문브런치에서 읽기)
|
|
|
<은중과 상연>: 여성들 간의 관계
김은실, 또 하나의 문화 동인
넷플릭스에서 몇주간 광고가 되었던 <은중과 상연> 시리즈 드라마를 공개되자마자 보았다. 다소 긴 느낌이 들었지만, 재밌게 보았다. 드라마가 끝난 후에도 상연과 상연 어머니와의 관계, 그리고 가부장적이고 계급적인 가족제도와 이성애 제도 속에서의 여성들 간의 관계에 대한 생각이 여진으로 마음에 남았다.
드라마는 상연의 입을 통해 그녀가 느끼는 불안과 열패감의 기원이 어머니이면서 선생님인 윤현숙과의 관계에서 기원되었다고 말한다. 가족 내에서 어머니가 상연보다 오빠를 더 좋아한다는 것은 상연에게는 그리 큰 문제는 아니다. 상연도 오빠를 좋아하니까. 그리고 남성중심의 사회에서 오빠에게 거는 가족 내의 기대라는 것이 상식적이고, 또 허용가능하기 때문에, 엄마가 오빠를 더 좋아하는 것이 불안과 열패감을 가져오지는 않는다. 엄마가 사랑하는 착하고 똑똑한 오빠를 여자동생들도 사랑한다.
<은중과 상연>에서 문제는 상연의 엄마가 자기 반 친구인 은중과 자신을 공평하게 대하거나, 혹은 자기에게 하는 것보다 더 친절하고, 은중에게 더 관심을 갖는다고 느끼는 것에서 발생한다. ‘나의 엄마’인데... “어떻게 남인 은중과 자기를 공평하게 대하는가?” 이것이 어린 상연에게는 이해가 되지 않고, 자기가 인정받지 못하는 존재라는 의식을 갖게 만들고, 열패감을 갖게 만든다. 엄마의 인정을 갈망하는 상연에게 엄마/선생님의 인정을 받는 은중에 대하여 처음에는 엄마가 이해되지 않지만, 점점 엄마의 인정, 혹은 오빠나 다른 남성들의 인정이나 사랑을 받는 은중을 의식하고,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라고 인정하게 되면서 모방하고, 그 은중이 좋아하는 상대들을 자신도 좋아한다.
오랫동안 여성과 여성의 관계, 여성들 사이의 경쟁과 열등감, 자기 비하의 문제를 다루는 이성애 사회에 대한 페미니즘 논의에서 욕망이란 타인의 욕망을 모방하면서 형성되기 때문에 여성들이 자신이 인정하는 여성이 좋아하는 대상들을 같이 사랑하고 욕망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상연도 어머니, 오빠, 남성들의 인정과 사랑을 받는 은중이 욕망하는 것을 욕망하고, 질투하고, 사랑한다. 드라마는 은중의 욕망을 따라가며 좌절하는 상연의 모습을 보여 준다. 그러나 결국 이 드라마는 긴 세월을 통해 사랑한 관계는 상연과 은중이라는, 그들의 우정과 사랑의 관계를 보여준다. 그러나 여성들 간의 우정과 사랑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관계의 가능성이 무엇인지는 보여주지 못한다. 마지막에 죽음 조력자로 요청되는 과정에서 여성들 간의 관계에 대한 책임과 응답, 돌봄에 대한 대화가 더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기는 했다.
그러나 드라마를 보는 내내 은중과 상연 드라마의 내용과 관계 없이 나의 생각은 여성, 모성성 그리고 공평성, 정의에 관해 생각으로 흘러가곤 했다. 공적사회에서 역할과 지위를 수행하고 있는 엄마가 사회에서 작동하는 공평성이나 공적 가치의 기준을 가지고 딸이나 아들의 행위를 비난하거나 혹은 평가할 때, 그리고 자신이 행한 행위의 결과로 피해자가 된 타자를 더 옹호하고 자신의 행위를 비판할 때, 공적 역할을 수행하는 엄마를 자녀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아니면 남의 집 아이와 자기를 공평하게 대하고 있다고 느꼈을 때, 그것을 아이는 어머니가 아이에게 갖는 배타적 사랑에 대한 배신이라고 생각할까? (기술적으로 잘 다루는 문제를 차치하고,) 아니면 엄마를 공정하고 정의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할까? 아니면 사랑이나 모성이 없는, 모성적 보호를 해주지 않는 신뢰할 수 없는 보호자/어머니가 되어 버리는 것일까? 그래서 아이들이 심리적 상실감, 애착 상실, 불안이나 패배감 등을 갖는데 기여를 하게 되는 것일까?
드라마에서 상연은 자신의 어머니의 공평성이라는 잣대에 의해 상처를 입는다. 반면에 은중의 어머니는 어떤 상황에서는 가끔은 규칙을 어기면서도 은중의 편이 된다. 구체적이고 경험적인 차원에서 여성성, 모성과 ‘정의’ ‘돌봄’에 대한 토론을 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집단 성폭력에 가담한 손자를 고발하는 <시>의 할머니(윤정희 분)의 도덕성과 나이듦, 혼란을 같이 생각해보기도 했다.
어머니가 아니고 아버지일 경우는 어떨까? 물론 드라마 <은중과 상연>에서 상연이 아버지는 공정하지도 합리적이지도 않은 사람이지만. 만약 아버지가 공평하고 합리적인 태도를 취할 때에도 상연이 어머니에게서 느꼈던 감정적인 상실이나 배신감 혹은 불안을 느꼈을까? 그렇지 않았을 것 같다.
드라마의 끝에서 엄마/선생님인 윤현숙의 삶과 죽음은 나의 마음을 불안하게 했다. 아이들에게 좋은 엄마이고자 한 윤현숙은 실패한 어머니가 되어 혼자 고통스럽게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그러나 마침내 상연은 오랜 세월을 거쳐 자신이 사랑한 사람은 자신이 쫓아다닌 은중을 사랑한 대상들이 아니라, 바로 은중임을 알게 되는 것 같았다. 은중에게 죽음을 맞기 위해 가는 스위스에 동행해주기를 요청한다. 왜? 내가 너 은중을 사랑하니까? 그리고 너가 나를 가장 잘 아니까! (2025. 12, 또문 브런치에서 읽기)
|
|
|
함께 읽어요 : 김영옥, "말년성 개념을 지극히 범속하게 만들기" |
|
|
"시간에 천착해 보자면, 시간은 시의성(timeliness)과 비시의성(Unzeitgemässigkeit/lateness) 사이에서 동요한다. 시간은 언제나 어긋나 있다(골절 상태다out of joint). 그러니 망명한다고 해도 그 망명의 영토는 언제나 불안정하다. 예술에서나 삶에서나 적절한 때가 존재한다는 가정에 토대를 둔 게 시의성의 개념이다. 시간에 맞게 늙어 가는 게 시의성이라면, 이때의 ‘시간에 맞게’는 강요된 합의, 강제된 정상성이다. 그렇다면 아도르노나 사이드가 주목하는 저 ‘위대한’ 남성 단독자 주체인 예술가나 비평가가 아닌 범속한 너와 나, 늙고 병들고 아프고 (고독이 아니라) 외로운, 빈곤한, 잃을 게 없는 노년들은 어떻게 늙어가야 하나? 이들에게 ‘시대정신과 불화한다’는 저 멋지고 웅장한 삶의 태도인 말년성은 어떤 방식으로 구현될 수 있나? 아도르노 자신이 시도했듯이, 용인될 수 없는 긴장과 고집으로 어떻게든, 다른 어떤 곳도 아닌, 다른 어떤 규범이나 제도도 아닌, 바로 저 '상처받은 삶에서' (『미니마 모랄리아』) 미래/세대에 책임지기 위한 성찰을 해 나가는 것이리라. 실제로 많은 이들이 이렇게 한다. 말년성 개념이나 담론에 은근히 숨겨져 있는, 아니 노골적으로 전제되고 있는 조건들이 얼마나 시대착오적인가(!)를 직시하면, 그래 보이지 않을지도 모르는 많은 이들이 사실은 나름의 말년성을 구현하며, 시간을 일깨워 흐르게 한다는 걸 알 수 있다. 교육받고 훈련된 고도의 성찰성이 있어야 하고, 전문가이면서 동시에 전문성은 돈 버는 생계를 벗어나 활용하는 여유가 있어야 하고, 각종 규범의 좁은 현실 타협주의를 거부할 수 있을 만큼 안목이 있어야 하고, 문화 예술을 비롯해 탁월한 언어 능력을 갖춰, 절대 자신을 누군가가 대리하게 만들지 않을 수 있어야 한다 등등의 어떤 수준을 요구하면서, 말년성을 마치 특정인만이 소유하고 누릴 수 있는 정치적·도덕적 자산인 것처럼 으스대는 거야말로, 시대착오성을 배신하는 반시대착오적 시대착오 아닐까." (전문보기: [나이듦을 읽다] 김영옥, 말년성 개념을 지극히 범속하게 만들기, 2025. 11. 18 * 출처 : 채널예스) |
|
|
- 이 글에 대해서 김은실 동인께서는 "나이듦을 신체적 정신적 정서적으로 살아내는, 또 나이듦의 과정에 대해 생각하고, 나이듦을 새로운 방식으로 살아내려는 남녀의 고령 시민이 많아지는 사회에서 엘리트 남성 지식인들에 의해 사유되고 쓰여졌던 추상적이고 독점적이었던 '말년성'에 대한 역사화, 지식사회학적인 혹은 젠더 맥락적인 설명이 좋았습니다. 나이들면서 일상적 삶과의 관계 속에서 변화되는 생각들, 새롭게 구성되는 삶의 방식이나 관계들에 대한 사유와 실천에 대한 글들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라고 댓글을 달아두셨답니다.
여러분들께서도 꼭 <전문보기>를 클릭하여 전문을 다 읽어보시고, 또 다른 생각들 나눠주세요.
|
|
|
송구영신 12월이 되었는데 송년모임은 하게 되려나 궁금하셨지요? 바쁜 시기에 송년모임은 미뤄두고, 활발한 기운과 좋은 소식이 많을 거라는 "붉은 말의 해" 2026년에 신년모임으로 시작하려고 합니다. 1월 중순 즈음 대부도의 담소재에서 뵙게 될 것 같습니다. 건강하고 안전하고 따뜻하게 해넘이, 해맞이 하시기를. 새해에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한 해 동안 감사했습니다. |
|
|
'담소재'는요. 아래 정진경 동인께서 직접 전해주신 소개말씀으로 갈음하겠습니다. 저희 집 바로 앞에 몇 년 전부터 정병호 선생이 짓기 시작한 건물이 완공되어 이제 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름은 담소재로 지었고 바닷가 언덕 위라 조용하고 경치가 수려한 곳입니다. 1층과 2층 각각 50 평이라 5명 이상 40 여명 정도의 회의까지 가능합니다. 워크샵, 세미나, 공감대화, 북토크, 작은 콘서트 등에 사용할 수 있구요, 공동육아 어린이들을 위한 놀이터로도 쓸 계획입니다. 공동육아, 또 하나의 문화, 홋카이도발굴팀, 어깨동무, 하나둘학교, 조각보 등 동지와 제자들, 우리가 믿는 시민단체들에는 청소비만 받을 예정입니다. 가까이 아는 단체 한정으로 엠티식 단체숙박이 20명까지 가능합니다. 지속가능한 운영을 위하여 가끔 외부에도 대여하려 하는데 그럴 때는 많이 받을 예정입니다. 비용은 아직 확정하지 못했는데 곧 네이버 카페를 열면 알려 드리겠습니다. 예전에 우리가 잘 썼던 바람과 물 연구소처럼 회의도 하지만 마음이 편안히 쉴 수 있는 아름다운 곳을 만들려고 노력했습니다. 운영위원 여섯 분이 애써 주시고 사무처장은 공동육아 깨몽 선생님이 맡아 주셨습니다. 선생님들이 하시는 일에 많이 써 주시면 기쁘겠습니다. (2025. 10) |
|
|
또 하나의 문화와 함께 하시는 분들후원회원(가나다순): 곽영선, 권김현영, 김경희, 김명신, 김미현, 김보화, 김소영, 김신현경, 김영경, 김영옥, 김유익, 김은실, 김정은, 김정희원, 김주희, 김찬호, 김태형, 김현미, 김혜련, 김효정, 김희옥, 남정호, 문수복, 문정주, 박나미, 박은, 박진숙, 박총, 배채은, 백경흔, 변재란, 소영, 손은정, 신유리, 안혜경, 안희경, 안희옥, 양선미, 양현아, 여은영, 연주희, 우은희, 유승희, 이경자, 이소희, 이수정, 이숙경, 이은아, 이은주, 이정주, 이지예, 이진아, 이헌미, 장필화, 전유나, 정진경, 정혜란, 정혜진, 정희진, 조민아, 조옥라, 조은, 조형, 조한혜정, 지현, 채혜원, 최소연, 최수연, 최은숙, 최한솔, 한혜정, 허순희, 현유라, 황은진(74명) 월1만원 신규회원가입 신청하기: https://webcm.co.kr/system/platform/index.html?id=tomoon2022 |
|
|
또 하나의 문화tomoon.tomoon@gmail.com서울시 마포구 와우산로 174-5 대재빌라 302 (전화 02-322-7946)수신거부 Unsubscribe |
|
|
|
|